지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서도 가능합니다. 지혜는 최선과 차선을 구별할 줄 아는 역량입니다. 지혜는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는 역량이 아닙니다. 지식은 가졌어도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종종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독선적으로 선을 택하게 됩니다. 지혜는 오히려 가장 선한 것과 선하되 가장 선하지는 않은 것의 차이를 구별하고 가장 선한 것을 위해서 다른 선한 것을 포기하는 역량입니다. 더 나아가 능력은 가장 선한 것과 그 보다 조금 덜 선한 것 중에서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고 다 성취하는 역량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의 특공 작전으로 사살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생포하지 않고 사살한 결정에 대해서 시비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빈 라덴의 생포, 빈 라덴의 사살, 특공대원의 안전, 작전의 성공, 파키스탄과의 관계 등 최선을 추구해야 할 다양한 숙제들 중에서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티벳 불교의 수장이고 티벳 사람들의 국민적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반 라덴의 사살은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 며칠 후 그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슬픔을 느꼈다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 사이에서 무엇인 최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 밝히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해서 원전에 대한 공포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의 유익과 그에 따른 위험, 다른 에너지 원에 비교해서 더 나은 점과 못한 점, 환경 문제가 더욱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친화적인 에너지 원 중에서 원자력 발전이 차지하는 위치 등 많은 고려할 숙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결코 흑과 백처럼 선과 악의 선택이 되지는 못합니다.

얼마전 4.19 기념일을 맞아서 이승만 대통령의 가족이 4.19 희생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4.19 희생자 가족들은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이 사과할 자격조차 없는 천하에 가장 흉악한 철전지 원수인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대통령과 4.19를 초래한 부패한 독재자라는 평가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선택이 아닙니다. 최선과 차선의 선택이 남았을 뿐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5.16 50주년이 됩니다. 다시 한번 5.16에 대한 논쟁이 일게 될 것입니다. 혁명인가 아니면 구데타인가, 5.16은 법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가 등등 다양한 논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5.16 에 대한 평가도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하려고 하면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선에서는 최선과 차선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과 차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이유는 인간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선과 차선을 다 만족시킬 뿐 아니라 최악과 차악까지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최선과 차선, 최악과 차악을 모두 해결하신 현장이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총 앞에서 겸손해 질 때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