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인 줄 아느냐?”라고 묻는다.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인 줄 알았던 나는 성경대로 대답해 주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한다. “아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다”라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은 사생아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웬 시비야” 라는 생각을 갖고 그에게 이사야 7:14절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처녀를 통해서 태어나신 메시아라고 말해 주었다.
아마도 그는 같은 질문을 내게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었고 대략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사야 7:14절에 예언된 대로 처녀를 통해 태어나셨다고 대답하는 내게 “결혼했느냐?”고 묻는다. 물론 “나는 결혼했고 아이들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다시 묻기를 “결혼할 때에 네 아내는 처녀였느냐? 아니면 유부녀였느냐?”고 묻는다. 나는 처녀였던 아내와 결혼했기 때문에 “물론 처녀였다”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거 봐라 처녀가 잉태하여 자녀를 낳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어! 이것 봐라” 생각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이사야 7: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란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는구나?”그러면 더 이상 계속 대화할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똑 같은 본문임에도 유대인의 관점과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두 번에 걸쳐 마리아를 처녀라고 기록하였다 (눅1:27). 처녀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천사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랬다. “(처녀인 제가 잉태를 하다니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눅 1:34). 천사는 마리아에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을 믿었고 그래서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의 몸으로 메시아를 잉태하고 해산하였다.
히브리어로 ‘알다’는 ‘야다아’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아는 것(knowing)과 동침하다(sexual intercourse)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창4:1). 남자를 알지 못했던 처녀 마리아에 대한 이 표현은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리브가와 관련이 있다. 창세기 24:16절에 따르면,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에서 같은 단어인 야다아가 사용되었다.
칠십인 역(LXX)에서 이사야 7:14절의 처녀에 해당되는 단어는 파르테니아스이다. 누가는 유대 사회에서 동정이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복음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여 선지자 안나는 결혼할 당시 처녀였다 (눅 2:36).
의사인 누가는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고 해산하는 오묘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5). 예수님을 잉태하고 해산했을 때에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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