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적인 체펠 마을 방문
20대 후반의 집시 형제인 라슬로와 교제를 하면서부터 이제 시간만 나면 체펠 집시 마을 방문하게 되었다. 라슬로를 만나더라도 의사소통이 원활한 것도 아니었지만 서로 바라보면 반가워하는 얼굴 표정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방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라슬로의 가정 뿐 아니라 이웃에 있는 집시 가정들과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과 만남을 위해서 슈퍼마켓에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빵, 감자, 계란, 식용유 등을 정성껏 준비해서 함께 나눌 때에는 모두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고마워하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체펠에 있는 집시 가정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모든 가정에 별도의 부엌이 없다는 점이었다. 수도도 없고, 집 안에 화장실조차 없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집시선교 사역을 계속하면서 훗날에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지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또한 집시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모든 집시들에게서 동일하게 똑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같은 것이었다. 유독 냄새에 민감했던 나에게 집시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늘 내 머리를 아프게 하였고, 비위를 상하게 하였는데 그럴 때 마다 내가 집시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냄새를 극복하는 일이 나에게 큰 기도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라슬로 형제의 집을 비롯해서 체펠 집시마을에는 뒷집에 부모님, 그 이웃에는 형, 동생, 누나 등 모두가 가정을 이루고 한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라슬로 형제의 아버지는 작은 체구이시지만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다른 집시 아주머니들 하고는 달리 단아한 모습이셨다. 형과 누나는 술에 절여 있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고 동생 역시도 가끔 술에 취해 있는 날들이 있었다. 라슬로 형제를 방문할 때에 종종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도 술판을 마칠 때면 위아래도 없이 소리 소리를 지르며 결국 싸움으로 끝을 내는 날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슬로 형제는 전혀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있는 가족들을 보면서 늘 안타까워하며 슬픈 표정이었다.
라스로 형제 어머니의 장례
그러던 어느 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가 당료 합병증으로 병원에 출입을 하게 되었고 그의 병이 상당히 빨리 악화 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침대에 누운 뒤로 등에 욕창이 생기게 되어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후 우리는 매일 체펠 마을을 찾아가 침상에 누워계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그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기도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가끔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약값이라도 조금 보태시라고 많지 않는 돈을 손에 쥐어드리면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작은 용돈을 드렸는데 잠시 뒤에 라슬로 형제 어머니의 손에 쥐어 있던 돈은 이내 아버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돈이 약값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술값으로 쓰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어느 날엔가는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가지고 와서 약을 사야 하니 약값을 좀 대달라고 대놓고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에 고통당하고 있는 아내의 병 치료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을 이유로 당신의 술값을 챙기는 방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등에 생긴 욕창으로 인해서 누워있는 허름한 침대 이곳저곳에 피고름이 묻어 있었고 그분 곁에라도 서 있노라면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오곤 했다. 그래도 꾸준히 방문을 하는 중에 아내인 안나 선교사는 오랜 기간 동안 병원에서 근무를 해서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등에 생긴 욕창을 소독해 드리기도 하고 깨끗한 침대커버로 바꿔서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하였다.
나 역시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병이 악화가 되면서 아마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들고서 비록 병석에 누워계시지만 누운 자세로 사진 촬영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께 보여드리니까 아무런 말씀이 없이 눈가에 눈물만이 고여 있었다.
그러던 중에 며칠 루마니아를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루마니아로 가면서 며칠 동안에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떠났는데 루마니아에서 돌아와 보니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가 소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나 집시형제의 가정이었고 또한 짧은 기간이지만 병석에 누워계실 때에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였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서 여러 지역에서 일가친척들이 조문을 왔는데 음료수 한 병 대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라슬로 형제에게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느냐?” 고 물으니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집시 악사를 불러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전통인데 악사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된다기에 악사를 위한 성의 표시를 위해서 얼마간에 조의금과 조문객들을 위해서 음료수를 구입해 주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샤로스파탁 카톨릭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다수의 체펠 마을 집시들이 카톨릭 교회에 나간 적은 없지만 카톨릭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어서 죽게 되면 카톨릭 교회 묘지에 묻히게 되는 것이었다. 라스로 형제 어머니의 장례는 천주교회 미사로 진행 되었는데 체펠 마을 주민들 모두가 정성껏 조화를 준비해서 참여하였다.
우리 역시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흰 장미 몇 송이를 준비해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집시 장례식에는 집시들 모두가 최대한의 예를 갖춘다는 점이다. 고인의 생전에 그리 친밀한 교제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장례식만은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집시들의 전통이기도 하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마도 고인이 이 땅에서 소외받는 집시의 신분으로 태어나 살아생전 가난과 질곡의 세월을 살았기에 그분의 삶을 생각하면서 모두가 함께 동감하면서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이 땅에 살면서 누구의 관심과 사랑조차 받지 못했던 그에게도 마지막 가는 길에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편안히 누울 수 있는 한 평의 땅이라도 제공을 받을 수 있었다.
20대 후반의 집시 형제인 라슬로와 교제를 하면서부터 이제 시간만 나면 체펠 집시 마을 방문하게 되었다. 라슬로를 만나더라도 의사소통이 원활한 것도 아니었지만 서로 바라보면 반가워하는 얼굴 표정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방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라슬로의 가정 뿐 아니라 이웃에 있는 집시 가정들과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과 만남을 위해서 슈퍼마켓에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빵, 감자, 계란, 식용유 등을 정성껏 준비해서 함께 나눌 때에는 모두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고마워하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체펠에 있는 집시 가정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모든 가정에 별도의 부엌이 없다는 점이었다. 수도도 없고, 집 안에 화장실조차 없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집시선교 사역을 계속하면서 훗날에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지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또한 집시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모든 집시들에게서 동일하게 똑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같은 것이었다. 유독 냄새에 민감했던 나에게 집시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늘 내 머리를 아프게 하였고, 비위를 상하게 하였는데 그럴 때 마다 내가 집시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냄새를 극복하는 일이 나에게 큰 기도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라슬로 형제의 집을 비롯해서 체펠 집시마을에는 뒷집에 부모님, 그 이웃에는 형, 동생, 누나 등 모두가 가정을 이루고 한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라슬로 형제의 아버지는 작은 체구이시지만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다른 집시 아주머니들 하고는 달리 단아한 모습이셨다. 형과 누나는 술에 절여 있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고 동생 역시도 가끔 술에 취해 있는 날들이 있었다. 라슬로 형제를 방문할 때에 종종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도 술판을 마칠 때면 위아래도 없이 소리 소리를 지르며 결국 싸움으로 끝을 내는 날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슬로 형제는 전혀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있는 가족들을 보면서 늘 안타까워하며 슬픈 표정이었다.
라스로 형제 어머니의 장례
그러던 어느 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가 당료 합병증으로 병원에 출입을 하게 되었고 그의 병이 상당히 빨리 악화 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침대에 누운 뒤로 등에 욕창이 생기게 되어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후 우리는 매일 체펠 마을을 찾아가 침상에 누워계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또한 그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기도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가끔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약값이라도 조금 보태시라고 많지 않는 돈을 손에 쥐어드리면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작은 용돈을 드렸는데 잠시 뒤에 라슬로 형제 어머니의 손에 쥐어 있던 돈은 이내 아버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돈이 약값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술값으로 쓰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어느 날엔가는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가지고 와서 약을 사야 하니 약값을 좀 대달라고 대놓고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어가고 있을 때에 고통당하고 있는 아내의 병 치료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을 이유로 당신의 술값을 챙기는 방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등에 생긴 욕창으로 인해서 누워있는 허름한 침대 이곳저곳에 피고름이 묻어 있었고 그분 곁에라도 서 있노라면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오곤 했다. 그래도 꾸준히 방문을 하는 중에 아내인 안나 선교사는 오랜 기간 동안 병원에서 근무를 해서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등에 생긴 욕창을 소독해 드리기도 하고 깨끗한 침대커버로 바꿔서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하였다.
나 역시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병이 악화가 되면서 아마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들고서 비록 병석에 누워계시지만 누운 자세로 사진 촬영을 하여 액자를 만들어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께 보여드리니까 아무런 말씀이 없이 눈가에 눈물만이 고여 있었다.
그러던 중에 며칠 루마니아를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루마니아로 가면서 며칠 동안에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떠났는데 루마니아에서 돌아와 보니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가 소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나 집시형제의 가정이었고 또한 짧은 기간이지만 병석에 누워계실 때에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였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서 여러 지역에서 일가친척들이 조문을 왔는데 음료수 한 병 대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라슬로 형제에게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느냐?” 고 물으니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집시 악사를 불러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전통인데 악사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된다기에 악사를 위한 성의 표시를 위해서 얼마간에 조의금과 조문객들을 위해서 음료수를 구입해 주었다.
라슬로 형제의 어머니는 샤로스파탁 카톨릭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다수의 체펠 마을 집시들이 카톨릭 교회에 나간 적은 없지만 카톨릭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어서 죽게 되면 카톨릭 교회 묘지에 묻히게 되는 것이었다. 라스로 형제 어머니의 장례는 천주교회 미사로 진행 되었는데 체펠 마을 주민들 모두가 정성껏 조화를 준비해서 참여하였다.
우리 역시 다니엘 목사님과 함께 흰 장미 몇 송이를 준비해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집시 장례식에는 집시들 모두가 최대한의 예를 갖춘다는 점이다. 고인의 생전에 그리 친밀한 교제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장례식만은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집시들의 전통이기도 하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마도 고인이 이 땅에서 소외받는 집시의 신분으로 태어나 살아생전 가난과 질곡의 세월을 살았기에 그분의 삶을 생각하면서 모두가 함께 동감하면서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이 땅에 살면서 누구의 관심과 사랑조차 받지 못했던 그에게도 마지막 가는 길에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편안히 누울 수 있는 한 평의 땅이라도 제공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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