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은 기독교 경전을 구성하고 있는 양대 계시중의 한 부분이며, 양으로 본다면 성경 전체의 삼분지 이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구약'이란 말은 '신약'이 새로운 약속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옛 약속’을 의미하는 명칭이다. 또한 구약은 유일신을 섬기는 삼대 종교(기독교, 천주교, 유태교)가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이기도 하며, 한 권으로 된 하나님의 계시의 모음집이기도 하다. 구약은 또한 인류의 고귀한 문학 작품이며, 가장 고귀하고 신뢰할 만한 인류의 유산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이며, 인간에게 창조주의 성품과 뜻을 알려주는 신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중한 구약이 현실적으로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렵고 등한시 여김을 받는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호주의 신학자인 그레이엄 골드워즈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구약은 시대적으로 구 시대의 유물이며 신약의 배경이나 보조 자료 정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현대주의자, 인본주의자들 혹은 보수주의자들까지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피하고 싶은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이나 가나안 옛 거주민들에대한 무차별한 학살, 저주, 근친 상간, 일부다처 억압적 율례 그리고 독선적 선민사상등이 휴머니스트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내용이기 대문이라는 점이다. 셋째로는 그 양이 너무 많고 내용의 어떤 부분들은 지루하고 복잡해서 전체적 구조가 한 눈에 쉬 들어오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해서 소중한 구약이 성도들로부터 등한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덧붙여 구약의 정황과 우리가 사는 시대 사이에 현존하는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구약의 내용에 접근해 보려는 성도들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고 성숙한 성도들은 구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며 사랑한다. 구약은 신에 대한 인간의 신 의식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과거의 옛 일이나 다루고 있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위이며, 또 신약의 보조자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계시의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려는 불신앙적인 자세이고 성경자체가 가지는 권위와 영감성을 고려치 못한 미숙함의 발로라 할 것이다. 구약은 신약에 종속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항상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체적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란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읽어야 한다. 이 말은 크리스챤에게는 신약과 구약이 꼭 같은 무게로 읽혀져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데는 신약이나 구약의 문구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원받은 성도에게 신약의 가르침이 필요하듯이 꼭같은 무게로 구약의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구약이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향하는 예언의 계시였다면, 신약은 구약을 바탕으로 하여 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이 없다면, 신약의 복음도 없게 되는 것이 논리의 귀결인 것이다. 거듭 강조되지만, 신약은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신약의 종속물이 아니라 독자적이며 동등한 가치의 구원계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에는 시대적, 문화적 간격을 이해하며 읽어야 하고, 또한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점진적 드러남이란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간에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이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구약속의 신앙의 보고를 잘 휘젓고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이 글이 기여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 다음 시간엔 창세기 1~11장속에 있는 구속사의 기본적인 구조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호남 목사(샬롬장로교회 담임/호주)
Ph.D. The University of Sydney
이렇게 소중한 구약이 현실적으로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렵고 등한시 여김을 받는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호주의 신학자인 그레이엄 골드워즈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구약은 시대적으로 구 시대의 유물이며 신약의 배경이나 보조 자료 정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현대주의자, 인본주의자들 혹은 보수주의자들까지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피하고 싶은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이나 가나안 옛 거주민들에대한 무차별한 학살, 저주, 근친 상간, 일부다처 억압적 율례 그리고 독선적 선민사상등이 휴머니스트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내용이기 대문이라는 점이다. 셋째로는 그 양이 너무 많고 내용의 어떤 부분들은 지루하고 복잡해서 전체적 구조가 한 눈에 쉬 들어오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해서 소중한 구약이 성도들로부터 등한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덧붙여 구약의 정황과 우리가 사는 시대 사이에 현존하는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구약의 내용에 접근해 보려는 성도들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고 성숙한 성도들은 구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며 사랑한다. 구약은 신에 대한 인간의 신 의식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과거의 옛 일이나 다루고 있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위이며, 또 신약의 보조자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계시의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려는 불신앙적인 자세이고 성경자체가 가지는 권위와 영감성을 고려치 못한 미숙함의 발로라 할 것이다. 구약은 신약에 종속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항상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체적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란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읽어야 한다. 이 말은 크리스챤에게는 신약과 구약이 꼭 같은 무게로 읽혀져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데는 신약이나 구약의 문구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원받은 성도에게 신약의 가르침이 필요하듯이 꼭같은 무게로 구약의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구약이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향하는 예언의 계시였다면, 신약은 구약을 바탕으로 하여 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이 없다면, 신약의 복음도 없게 되는 것이 논리의 귀결인 것이다. 거듭 강조되지만, 신약은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신약의 종속물이 아니라 독자적이며 동등한 가치의 구원계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에는 시대적, 문화적 간격을 이해하며 읽어야 하고, 또한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점진적 드러남이란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간에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이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구약속의 신앙의 보고를 잘 휘젓고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이 글이 기여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 다음 시간엔 창세기 1~11장속에 있는 구속사의 기본적인 구조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호남 목사(샬롬장로교회 담임/호주)
Ph.D. The University of Syd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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