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지구촌교회 김성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시애틀 지구촌교회 김성수 목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우라"(마태 11:29). 주님은 영광의 왕좌가 아니라 발 씻김의 자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크고 빛나는 것'을 추종하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병든 이의 손을 잡아 주시고, 버려진 이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십자가의 수치를 품으셨습니다. 그 길을 따르는 우리 모습이 '위대함'이 아닌 '겸손함'이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섬김의 삶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섬김이란 프로그램이나 의무가 아니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고, 그들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여기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곁에 머무르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권능'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한19:30). 그 '이룸'은 거대한 성과가 아니라 한 생명의 구원을 향한 '헌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요? 교회는 때로 '성장'과 '성공'을 우상처럼 추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참 제자는 주님이 가신 길을 묵상하며, 내일의 비전보다 오늘의 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옆자리 동료의 지친 얼굴을 읽어 내고, 홀로 고민하는 이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당신은 소중해요"라고 전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현실로 옮기는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길을 즉각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막으려 했고, 유다는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과 실패를 거쳐 '예배와 섬김, 즉 교회 DNA'를 갖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 28:19).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내가 만든 추종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어떤 목적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내 야망을 채울 도구로? 아니면 주님 사랑을 전할 그릇으로? 화려한 비전은 사람을 현혹하지만, 겸손한 섬김은 영혼을 살립니다. 주님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작은 사랑'을 기뻐하십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이웃의 발을 씻겨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갑니다.

섬김은 결국 '나(ego)'가 사라지는 연습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 주님이 그러셨듯, 우리도 '작아지는 용기'로 이 시대를 감싸 안읍시다. 그 길이 진정한 영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