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선생은 3·1만세 운동의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오산학교를 세워서 위대한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어떤 글을 보니 '남강 선생은 한국의 페스탈로치(스위스 교육학자, 사상가)다'라고 칭송했다. 그는 구식 서당 출신으로 장돌뱅이로 시작해서 거상이 된 전형적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3·1 독립운동선언서>를 만들도록 기획했고, 기독교 대표들을 비롯하여 천도교와 불교 대표들까지 아우르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만천하에 알리고 만세운동을 통해서 잠자는 민족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필자가 남강 선생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40여 년 전에 우연히 남강 선생의 유묵 한점을 갖게 된 것이 동기가 되었다. 그 유물은 오래전에 쓰여진 한시로 나는 알 길이 없었는데, 한문 전문가인 박재성 박사의 자문을 얻었더니 '이것은 남강 선생의 글이고 중국의 한시를 쓴 것이다'라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 귀한 글을 내가 간직하는 것보다, 이것을 고이 간직하고 보존하고 알리는 기독교 기관에 기증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남강 선생이 세웠던 오산(五山) 고등학교에 기증 의사를 말했더니 받겠다고 해서 기증했다. 그러나 그것을 받은 학교장, 교직원, 학생들도 남강 선생의 고귀한 애국에 무심한듯했고 그의 사상과 삶을 제대로 아는 자들이 없는 듯했다.
남강 선생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조만식 선생이요, 조만식 하면 떠오르는 분은 주기철 목사이다. 또한 그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나 당시에 함태영 이시영,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과 교분을 가졌다. 남강 선생은 오늘로 치면 자수성가한 실업인이었다. 그는 이조 말엽 나라가 뒤죽박죽되어 없어지고, 왕실은 쇠락하고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시대에 태어났다(1864). 10세 때 사환으로 들어가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당대에 기업주가 되었다. 찌들게 가난하게 태어나서 완전 빈털터리었으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책이 없어서 옆 친구에게 빌려보고 글씨는 주판(洲板- 나무를 그릇처럼 파서 만들고 부드러운 흙을 채워서 쓰고는 흔들어 지은 후에 또 다른 글자를 쓰는 것)을 사용했다. 남강은 매일 매일 글 읽고 쓰기를 3년하고 과거를 보려는 마음으로 열심이었으나, 부친이 별세한 후 그 뜻을 접었다. 하지만 남강은 근면 성실하고 꿈이 커서 이상향(理想鄕)을 건설하기로 하고,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여 당대 국내 제일의 무역상으로서 물가를 좌우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집권하자 당오(當五) 당백(當百) 등의 돈을 만들고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르니 남강의 사업은 망했다.
남강은 한문 서당 출신이지만 큰 뜻을 가지고 민족을 깨우는 교육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때 평양 모란봉에 수만 군중이 모인 곳에 <도산 안창호>가 연설을 토했는데, 그 연설에 남강은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때 도산의 연설 중에
"여러분! 울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우리가 못 생겨서 당한 일인데 누구를 원망합니까? 우리가 분한 생각으로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 일본놈 한 사람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서양 문명을 받아서 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의 대세를 알고 국민의 단결하여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은 사천만이라 하지만 그들은 뭉쳐서 하나가 되었고, 우리는 이천만 동포가 모두 떨어져 각각 흩어져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그놈들을 막으려면 한데 뭉쳐야 합니다...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작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뜨거운 연설이 끝나자 남강은 그의 손을 굳게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당신의 하신 말씀을 잘 들었소! 참 좋은 말씀이요, 옳은 말씀이요, 사람이란 옳은 말을 행하는 것이 제일이요, 나는 당신의 말이 옳은 줄 알고 곧 행하기를 맹세하는 의미로 이 자리에서 내 머리를 깎겠소!"라고 하고 머리를 깎았다. 청년 도산 안창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생이 미국까지 돌아보았지만, 선생처럼 실행에 옮기는 이는 처음 보았다" 하며 뜻을 합하여 국가사업에 이바지할 것을 청하고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 후 남강은 사재(私財)를 털어 오산학교를 만들고 인재를 양성했다. 그러나 남강은 신민회(新民會)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105인 사건에 관여되어 일제로부터 가혹한 옥살이를 하고 고문을 받아야 했다.
남강 이승훈이 복음을 받고 회개한 후에 그가 영수 시절에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1년을 공부했다. 그때 평양신학교 2대 교장인 라부열 박사는 남강에게 "당신은 목사가 될 사람이 아니고, 더 큰 일을 할 사람이니 신학 공부 1년이면 족하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1919년에 와서 남강은 입을 열었다.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일이 있어야 하오! 교육도 필요하고, 무장 독립군도 필요한데,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 전체의 의사를 발표해야 할 터인데...」 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는 손정도, 양전백, 길선주, 함태영, 유여대, 김병조 등을 모아 거사를 계획했고, 우선 장로교 목사들을 합한 후, 감리교 지도자들을 가입시켰고, 후에 천도교와 불교 지도자들을 은밀히 회동하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독립 선언서의 초안은 육당 최남선이 만들었다. 그렇게 거사를 얼마 앞두고 장로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경과를 보고하고 찬동하기를 청했더니, 목사들은 '우리는 종교인이다'라고 하면서 <독립 선언서> 서명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남강은 버럭 화를 내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나라도 없는 놈들이 어떻게 천당을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느냐!"고 고함쳤다. 오늘같이 기울어진 나라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목사님들에게 남강이 외쳤던 <하늘의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