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기 선교사
(Photo : ) 최민기 선교사

주여! 샬랄라라라라라….. 디오스 에스 아모르 이 뿌에데스 크레르 엔 헤수스 이 모랄 엔엘 아모르!

“00선교사님이 방언을 하다가 그 나라 언어가 터졌대”

“정말? 우와! 나도 그렇게 영어를 배웠으면 좋겠다”

신학교 때 돌던 소문이었다. 어떤 선교사님이 급히 선교지로 가게 되었는데, 공항에서 현지인을 만나자 갑자기 방언이 터지며 그 나라 말로 대화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언어라는 것이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상은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이 언어의 장벽을 완벽히 뛰어넘지 못한다. 선교사들이 무능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만큼 언어라는 것은 악인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흩으신 강력한 저주였기 때문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세기 11:7-8)

그래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하지 않다. 언어가 완벽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사역의 열매가 많이 맺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생으로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나름대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했고, 토익과 같은 공인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신학교를 공부하며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작은 한인교회에서 교육부서를 맡게 되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미국에서 나고 자란 2세들이었다. 담임 목사님은 한국어가 편하니 한국어로 사역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몇 주간 아이들과 지내보니 아이들의 Heart Language(마음의 언어)는 영어였고, 영어로 복음을 듣고 싶은 열망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설교, 찬양, 기도는 영어로 하자!”

그때부터 영어를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영어 설교를 열심히 준비했다.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어가며 최대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다. 거의 본문을 읽다시피 했지만, 설교, 기도, 찬양 모두 영어만 사용했다. 너무나 뿌듯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났지만, 아이들이 말씀을 잘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학생 중에 차분하고 성실한 자넷이라는 자매가 있었다. 자넷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자넷, 예배 시간에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니?”

“음… 3~5%정도요…” 많이 잡아줘야 5%라는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100% 영어로 말씀을 전했는데?”

“아 그러셨어요? 저는 처음에는 한국말로만 하시다가 요즘 영어를 조금 섞어서 쓰시는 줄 알았어요”

그제야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나는 영어로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 아이들은 내 영어가 영어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회장을 불러 물어보았다. 비슷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름 미국 신학교도 다니고 내 스스로 영어로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형편없는 내 실력이 다 드러난 것이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방언으로 언어가 터졌다는 선교사님이 생각나서 계속해서 뜨겁게 기도했지만, 영어 실력은 하루아침에 늘지 않았다.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께서 혼자 할 수 없다는 마음을 주셨다.

‘아! 내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알았지만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구나...’

학생 중에 데이빗이라는 친구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데이빗은 처음에는 거절하며 왜 꼭 영어로 말씀을 전하고 싶은지 캐물었다. 나는 데이빗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베드로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았던 베드로를 만나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똑같이 나를 만나주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부족하여 자주 실수하여 넘어지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던 이야기가 베드로의 이야기였고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아침을 차려주시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도 주셨다. 베드로의 삶은 단번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실패와 낮아짐 속에서도 변치 않은 예수님의 인내가 그를 변화시킨 것이었다. 나도 내게 맡겨진 양들이 굶어 메마른 삶을 살지 않도록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양질의 음식을 주고 싶었다. 초식 동물에게 육식을 먹일 수 없고, 매일의 양식을 인스턴트로 때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기를 원했고, 나의 진심이 데이빗에게 전해졌다. 데이빗이 말했다.

“전도사님은 멋진 분이었군요, 제가 돕겠습니다”

나는 데이빗에게 내가 작성한 영어 원고를 보냈다. 데이빗은 내가 영작한 문장들을 보고, 본래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 가운데 쓰이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영어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쓰이지 않는 단어와 표현들, 문장 구조는 영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나는 데이빗과 한국어 원고, 영어 원고 두 개를 펼쳐놓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데이빗은 내 영어 문장을 수정해 주었다. 내 영어 원고는 온통 빨간 줄이 쳐졌고, 고친 흔적들로 건축 설계도면을 방불케 했다. 10분 설교를 준비하는데 일주일의 시가도 부족했다.

나는 다음 주일 데이빗과 함께 완성한 원고를 들고 주일 강단에 섰다.

‘이제는 아이들이 100% 알아듣겠지’ 마음이 뿌듯했다.

예배가 끝나고 다시 자넷에게 물었다.

“오늘 말씀은 어땠니? 몇 %정도 이해했어?”

나는 자넷의 입에서 100%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자넷의 입만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음… 30%정도요, 전보다는 많이 들렸어요…”

“!!!!”

“…아 그렇구나, 고마워”

나는 애써 담대한 척했지만 사실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문제는 나의 억양과 강세, 띄어 읽기 등 전반적인 리딩능력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데이빗 안 되겠다. 원고를 네가 읽고 녹음해서 나에게 보내줘. 내가 그것을 듣고 연습해서 설교해 볼게”

이어폰을 귀에 꽂고 데이빗의 목소리를 일주일 내내 들으면서 지냈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로 녹음하여 데이빗의 것과 비교하며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과 발음으로 고쳐나갔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면서 자넷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예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도사님 예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어요”

“오늘 영어가 뭔가 달랐어요”

“오늘 말씀 와닿았어요,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자넷이 와서 말했다.

“이제 90%정도는 들리는 것 같아요,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예배당 뒷 뜰에 가서 홀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하나님,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이빗도 변하는 나의 모습에 기뻐하였다.

“데이빗 너무 고마워, 부족한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너를 사용하셨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는 것 같아”

그 이후 우리 가정은 매주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이 좁고 누추했지만, 무엇이든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었다. 부족한 형편에도 뉴포트비치 새벽 수산물 시장에 가서 게와 새우를 잔뜩 사 와서 아이들을 먹였다. 아이들이 물었다.

“왜 저희에게 이런 걸 만들어주세요? 넉넉하지도 않으실 텐데요?”

“그냥… 너희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소통이 완벽하게 되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영어 실력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었다. 결국 언어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 언어를 이긴다!

하나님이 언어를 흩으신 것은 장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신 것이었다.

선교사로 헌신하고 미국을 떠나기 전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함께 여행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헤어지는 건 슬픈 일이었다.

미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아이들이 우리 집 앞으로 몰려왔다.

“목사님은 ‘진짜’였습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