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 10시간 비행해서 도착한 나라, 영국은 미국에 비해 작은 섬나라입니다.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집회가 있던 윔블던과 센트럴 다운타운을 오가면서 넓은 길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좁은 골목길을 운전하는 느낌이었습니다. 4월인데도 날씨는 추웠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체감온도는 더 낮았습니다. ‘이래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러 바다로 나갔나?’ 싶을 정도였고, 따뜻한 캘리포니아 날씨가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나라에 와서 책에서 보던 곳을 친히 목격하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조지 뮬러(1805-1898)가 고아들을 위해 브리스톨(Bristol)에 시작한 보딩스쿨도 엄청납니다. 흔히 고아원(orphan house)이라고 알고 있지만, 기숙사가 있는 크리스천 보딩 스쿨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당시 최고의 설계사를 통해서 한 건물에 400명에서 500명 수용하는 견고하고 실용적인 건물을 5개까지 지으면서 큰 캠퍼스를 이루고, 그의 평생 10,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먹이고 재우면서 신앙 교육을 시켰습니다. 영국의 소망을 이어가며, 미래를 위한 일꾼으로 키워가는 일은 지금도 중단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엄청난 일을 조지 뮬러는 기도로 이루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은 한국의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서 목회하던 토마스 목사님은 37년간(1847-1884), 하노버 교회를 목회하면서, 둘째 아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안수하여 중국으로 파송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임신한 아내를 질병으로 잃어버린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파송한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내고 중국에서 통역관으로 지내다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가슴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당시 쇄국정책으로 문을 굳게 달아 건 한국 선교를 위해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에서 재가입을 신청하고, 백령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나중 27세의 나이에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재차 한국에 들어 갔지만, 결국 성경책만 나누어 주고 순교한 것입니다. 한편 허무한 죽음 같고,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한국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 토마스 목사와 그의 가족, 그리고 하노버 교회가 얼마나 한국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까?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에 순교한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적인 첫 선교사로 1885년 부활절에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거의 20년을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는 한해 전까지 목회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기도는 결코 헛된 기도가 아닌, 응답으로 찾아와 20년 만에 한국 선교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이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바로 지금 하노버교회의 담임목사가 한인 목사님이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선한 복수극에 찬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