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재철 목사님이 건드린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강연으로 논쟁이 뜨거웠다. 뒤늦게 목사님의 강연 영상, <어떤 목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를 봤다. 목사님은 이 강연에서 젊은 목회자들이 갖춰야 할 목회적 소양에 대해 여러 가지로 현 목회 생태계를 나름 비판하시면서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중직에 대해서만 뜨거운 것이 안타깝다.

목사님의 요지는 먹고 사는 것에 더 몰입하기보다 목회자로 갖추어야 할 본질에 충실하라는 내용인 것 같다. 목회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자립”인데, 성경적으로 경제적 자립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얼마 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는 능력이 아니라, ‘내게 얼마가 주어지든 그것에 나를 맞추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는 말씀을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은 목사님이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을 너무 모른다거나, 가진 것이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가? 오히려 목사님은 목회자가 더 내려놓고 본질을 추구하고 살면서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그 은혜를 체험해 봐야 그 목회가 힘 있는 목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무엇이 맞는 걸까? 어떤 논쟁이든 언제나 대립하는 입장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목회자 이중직에 대해 찬성 반대로 접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복잡한 층들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라 하더라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이중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아니 2중직 뿐이겠는가. 3중직 4중직도 해야 한다. 이것 가지고 교단이 ‘목회자는 이중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목회자를 사지로 내모는 격이며, 가난한 목회자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는 형국이다. 오히려 교단 차원에서 개 교회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져서 그들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민교회에서 목회자 이중직이 토론 거리도 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성도들도 목회자도 교단도 모두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자.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이중직을 하는 목회자의 자세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지 싶다. ‘목회자 이중직’이면 목회가 먼저이고 다른 직업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물론 다른 직업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목회를 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목회자들은 스스로도 목회에 비중을 두지 않기에 목회에 전념하라고 말씀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목회에 소명이 있고, 목회를 일구기 위해 애쓰고 고민하고 몸부림친다면, 부차적 직업에 쏟는 시간보다 목회에 더 많이 올인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차적 직업이 먼저이고 목회가 뒷전이면 괜찮은가. 먹고 살기 위해 부차적 직업에 올인하다 보니 목회할 시간은 부족하고, 교회도 작은 교회여서 올 사람도 없다면서, 일부 시간만 할애하면 그것이 진정한 목회인가. 먹고 사는 문제로 풀타임으로 일하면 목회는 언제 하는가. 그러니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이고, 그럴 바에야 다른 직업을 선택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그렇게 10년, 20년을 목회했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 10년, 20년 더해도 변화가 없을 것임은 자명하다. 목회자가 교회에 올인하지 않는데, 어느 성도가 그 목회자를 따르고 자신을 그 공동체에 헌신하겠는가.

제자 A 목사가 개척하면서 아내에게 ‘3년만 기다려 달라. 3년 동안 목회에 올인해서 자립이 안 되면 그만하겠다’고 했단다. 이런 자세야말로 2중직이든 3중직이든 논하기 이전에,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이지 싶다. 실제로 이런 마음으로 하니, 같이 하겠다는 이들이 모이고 역동적으로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았다.

이중직(二重職), ‘두 개’(二)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두 개의 ‘무거운(重)’ 직업이기도 하다. 거듭 말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두 개가 아니라 몇 개의 직업인들 갖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목회가 무겁고 귀중한 직업이라 여긴다면, 그 무게에 맞는 전적 헌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척교회 몇 년 했다는 년 수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존재를 걸고 목회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숫자 ‘이중’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겁고 귀중한 의미로서 ‘중직’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교인이 20, 30명 정도 되면 교회는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자립한다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고 이 악물고 거기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