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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 중인 전쟁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고 각성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 석 달이 지나고 있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저들의 비극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익히 아는 사실을 반복할 이유가 없지만, 1천만의 난민이 발생하고 많은 도시가 완전 파괴되었다.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생활 터전이 사라졌으며, 정신과 영혼이 절망하고 부르짖으며 미래가 깨져 버렸다. 사망의 권세와 어둠의 권세가 사방을 둘러싸고 온 세계인들의 마음을 옥죄고 있다.
병원이 파괴되는 것은 그들의 안전이 깨지는 것이고, 학교와 유치원 등 교육시설이 파괴되면서 저들의 미래가 부서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은 국가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는 비참한 일이다.
하루만 전기와 물이 없어도 한 가정의 삶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난리가 난다. 필자는 현장에서 40일간 물 없이 견딘 적이 있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울하고 절망이 되는지 경험하였다.
우크라이나 현장은 전혀 다르다. 모두 파괴돼 전기와 수도가 단절됐을 경우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것이 더욱 절망적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다.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동반한 수많은 가족이 피난하여 산다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일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지금이라도 속히 타협하고 절충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면서라도 평화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파괴를 막는다. 시민들이 젊은 군인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가? 다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더 이상 절망을 막아야 한다.
모스크바 북동쪽으로 350km를 올라가면 이바노보라는 도시가 있다. 일명 '신부의 도시'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 싸우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까지 3대가 목숨을 잃었다. 그 지역 남자들은 거의 모두 사망했다. 그래서 여자들만 남아서 사는데, 거의 80% 정도였다고 한다. 비참한 역사의 교훈이다. 막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속히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살다 보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안 되는 것은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하나의 지혜로운 대안일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1637년 2월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삼전도에서 조선 인조 임금은 청나라 사신 앞에 머리를 아홉 번이나 조아리면서 치욕과 모멸과 절망감에 떠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 <남한산성> 중 한 장면. |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조정 대신들은 피 튀기는 논쟁을 벌이게 된다. 항복해서 죽음과 파멸을 면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평화주의 온건파, 비겁하게 항복하여 명예를 더럽히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강경파의 대립이 참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두의 주장이 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를 지키느냐 아니면 목숨을 건지느냐, 이것도 저것도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인가는 좀더 논쟁을 해야 할 것이고 타협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거대한 힘과 무력 앞에서 강온파의 두 대립.
결국 임금은 백성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선택한다. 항복하여 비굴하고 처참한 삼전도의 비참한 역사 과정을 겪게 된다.
항복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임금 또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며, 조선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인가 아니면 자신과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인가, 두 길에서 생명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부정적인 결과는 첫째 나라와 임금, 대신들과 백성들은 모멸감을 당하면서 강자 앞에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됐고, 국가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둘째 비겁하게 항복하여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는 비난을 받게 됐다. 셋째 역사에 길이 남아 긍정 부정의 교훈을 남기게 된다.
긍정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백성이 살고 임금이 살고 나라가 전쟁으로 멸절되는 것을 막아 생명을 보존하였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완전한 상실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해체이고 절대 절망이다. 죽음 앞에 할 일이 없다. 다시라는 시작이 없다. 수천 억을 가졌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경에 "죽은 목숨보다 살아있는 개가 차라리 낫지 않을까"라는 말은 무엇인가?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것 아닌가? 우선은 살아있어야 무엇을 생각하고 분노하고 꿈꾸고 할 것이 아닌가?
둘째, 여러 가지 모멸감과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 있기에 분노할 수 있었고, 다음이라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내일을 희망하며 준비하고 역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분투하게 될 것이다.
생명이 있기에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억지를 부리고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절되는 것보다, 치욕의 한을 머금고 살면서 힘을 기르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논하기 어렵다. 각자의 해석과 판단, 시대적인 담론과 가치관에 의하여 당시 모든 일들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시각으로 당시 상황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 역사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