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고난주간 묵상 가이드는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와 이충재 박사가 공저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요단출판사, 2021) 내용 중 pp. 286-351 부분을 이장렬 교수가 발췌하여 압축, 개정했습니다. 요단출판사 및 공저자 이충재 박사의 동의 및 허가 하에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재사용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2022년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 마태복음 21~28장을 읽고 묵상하실 수 있도록 묵상 가이드를 준비했습니다. 다음의 순서에 따라 본 묵상 가이드를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1. 먼저 당일의 해당 성경 본문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한 번 이상 천천히 읽습니다.
2. '해설'을 주의 깊게 읽습니다.
3. 해설 내용을 참고하여 다시 성경 본문을 한 번 이상 묵상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4. 읽고 묵상한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5. 말씀 묵상과 기도 시간 중 깨달은 부분에 대해 노트를 하거나 저널을 하면 묵상이 더 심화됩니다.
6. 말씀 묵상은 순종에서 완성됩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더욱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 십자가에 내려 놓고 주님께 집중하시기 바라고 주님께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 고난 주간에 주변에 힘들어하는 성도님들을 위해, 특히 나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계신 분들 위해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그분들을 배려하는 한 주간 되시기 권면합니다.
[종려주일 4월 10일] 겸손한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l 본문: 마태복음 21:1-11
해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가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스가랴 9:9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방식을 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왕-메시아로 분명히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나귀를 타신 사건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보여줍니다. 당시 나귀는 민간의 행보에 사용되었고 군인들의 행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탄 메시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의 통치가 힘으로 위에서 강압하는 로마의 통치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통치 방식은 겸손히 낮아져서 그의 백성을 섬기는 것입니다(20:24-27). 그의 십자가 대속은 그러한 겸손과 섬김의 통치 방식을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렬에 동참한 군중들은 큰 소리로 "호산나[주: 본래 히브리어로 '하나님, 구원하소서!'란 의미를 지닌 찬양의 감탄]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군중들의 외침은 시편 118:26을 인용한 것으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왕을 환영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같은 외침은 예수님을 향한 군중들의 기대감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군중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즉시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타신 겸손하고 온유한 왕의 통치방식은 로마의 방식 혹은 로마 제국을 닮은 다른 강압적 통치방식들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예루살렘에 드디어 예수님이 입성하십니다. 참 왕이지만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메시아요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사랑과 섬김의 메시아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베푸신 그 섬김(대속의 죽음)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섬김을 따르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님의 방식을 따른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로마의 방식, 세상의 재력, 명예, 권력, 성공에 더 의존했던 것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새로이 좇고 싶습니다.
기도: 겸손하신 왕, 메시아 예수님의 섬김을 깊이 묵상하고 그의 길 따르게 하소서.
[월요일4월11일] 성전 뜰에서의 강력한 경고 l 본문 : 마태복음 21:12-17
해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유함이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아무 말도 않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실 회피적 태도와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이방인의 뜰)에서 시행되었던 희생제물 매매 및 환전 업무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유월절을 맞아 순례자들이 먼 곳에서 왔기에 희생제물을 사고파는 행위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순례자들이 외지 화폐를 갖고 있었던 점을 생각 할 때, 성전세 납부 및 희생제물 구매를 위한 환전 업무 역시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희생제물 매매 및 환전 업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가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방인의 뜰)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전 뜰에서의 제물 매매 및 환전 행위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방해 및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바로 그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6:7 말씀을 인용하시면서("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마21:13])이라 선포하심으로 성전이 그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열방을 위한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동시에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시위는 영적으로 타락한 성전제도 및 성전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면서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예레미야 7:11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마21:13)로 칭하시며 당시 성전지도자들의 종교, 경제, 사회적 특권 의식과 영적 타락을 폭로하십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가장 더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시각장애인들과 다리를 저는 장애인들을 치유하십니다(마21:14[레21:18 참조]). 이를 통해 당시 유대교에서 종교-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어 있던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어린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한 보잘것없는 촌구석(갈릴리) 출신 선지자'의 행동과 그를 향한 열광적 반응을 지켜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다그치지만, 예수님은 시편8:2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반문하십니다(마21:16).
예수님은 진정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아입니다. 1세기 유대교 내의 장애인들처럼 가장 소외되고 희망 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준이 모호하고 그저 '좋은 게 좋다'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성전에서의 강력한 시위와 경고는 이를 생생히 잘 드러내 줍니다. 성전 뜰에서의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그리고 그의 선명한 기준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마저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서운' 예수님이 바로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아이시며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주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사랑과 섬김의 주님이십니다(마20:28).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지 정리가 잘 안 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 감성, 의도에 잘 맞는 예수님의 모습만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님 그분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을 그대로 끌어안으십시오. 그리고 그분 품에 지금 여러분 모습 그대로 안기십시오.
기도: 성경말씀이 제시하는 예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게 하소서.
[화요일 4월12일] 성전 지도자들과의 논쟁 및 그들을 향한 책망 l 본문: 21:18-23:39
해설: 오늘 읽을 본문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21:18-22),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21:23-22:46),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향한 강력한 책망(23:1-39)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예수님의 행동(21:18-22)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적 행동'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함에 있어 종종 그 메시지를 극화(dramatize)하여 행동으로 직접 표현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적 행동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은 무화과나무 또는 생태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및 성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평가와 경고를 드러내 줍니다. 성전의 제사가 화려하고 제의적으로 엄숙하며 그 가운데는 성전(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엄청난 종교적 노력이 들어가 있을지언정, 주님의 관점에서 성전(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성전제도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부패, 타락, 변질되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상태에 있습니다(렘24:1-10 참조).
이어지는 마태복음 21:23-22:46은 예수님과 성전 지도자들 간의 논쟁 그리고 그 맥락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비유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전 지도자 간의 논쟁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및 그에 대한 예수님의 지혜롭고 권위 있는 응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성전에 오셨는데, 막상 성전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고 배척하며 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종교적으로는 얼마나 화려한지에 상관없이) 사실 영적으로 얼마나 어둡고 무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전의 지도자들은 논쟁에서 결코 예수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다시 바리새인들이 마치 사전에 번호표를 받은 듯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덫을 놓지만, 그들의 시도는 거듭 실패하고,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의 공개 논쟁을 포기합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예수]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6).
이어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강력한 책망의 말씀을 주십니다(마태복음23장).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위선(hypocrisy)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라고 하셨습니다(23: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말들 자체가 아예 다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겉으로는 엄숙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 된 듯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이신 하나님(23:20-22 참조)에 대해선 가볍게 생각하면서 종교적 형식만을 숭상했습니다(23:25-28). 여러 가지 일들에 과도할 만큼 정성을 보이고 신경을 썼지만 막상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23:23). 겉은 깨끗했으나 속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습니다(23:25-26). 어떤 분들은 '겉과 속이 다 일치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라고 반문하실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들이 혹시라도 우리의 종교적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23장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외식을 얼마만큼 선명하게 반대하셨고 또 얼마만큼 위선을 싫어하셨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종교적 위선으로 가득 찼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성전 지도자들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마23:32; 26-27장 참고) 사도들과 1세기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23:34 [29-31절 참조]).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23:37-39 참조). 근사한 종교적 형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근사하게 포장된 모습이나 가면놀이가 주님께는 아주 조금도 통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을 속일 순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즉시 정확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종교적 형식으로 믿음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대체하고자 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의 종교적 위선을 회개합시다. 더 늦기 전에 주님께로 돌이킵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기도: 위선을 회개케 하소서. 주께로 돌이키도록 도우소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소서.
[수요일 4월13일] 성전 멸망에 대한 주님의 예언과 재림에 대한 가르침 l 본문: 마태복음 24:1-26:5
해설: 오늘은 감람산 강화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24-25장 그리고 수난기사(passion narrative)로의 전환부인 26:1-5을 읽고 묵상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24-25장은 성전파괴(주후 70년에 성취됨)에 대한 예언 및 종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성도가 살아내야 할 지혜롭고 충성된 삶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비중 있게 사용하십니다(25:1-30).
마태복음 24-25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재림)을 병치시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예언하신 성전의 멸망이 말씀하신 시점으로부터 약 40여 년 후인 주후 70년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제자들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성전의 종말을 암시하는 전조들과 성전의 멸망이 실제 일어났습니다(24:34 참조). 그렇기에 예수님이 성전의 종말과 더불어 예언하신 역사의 종말(재림) 역시 말씀하신 그대로 실현될 것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주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 확신하는 동시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과 그때에 대해 미리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24:36). 그렇기에 주께서 늘 경성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를 위해 미리 기름을 사 놓은 다섯 처녀처럼(25:1-13) 그리고 주인이 맡긴 달란트로 열심히 비지니스를 해서 이윤을 남긴 두 명의 종처럼(25:14-30) 주님이 오늘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다는 생각으로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밤 주님께 최종 결산 보고를 할 자세로 매시간 충성된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늘 밤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깨어 있나요? 혹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리를 장롱에 넣어 놓고, 입으로는 이를 부인하지 않지만, 실제 삶으로는 회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장차 역사의 종말에 재림하셔서 '양들'(영생을 상속받을 의인의 무리)과 '염소들'(영벌을 받게 될 악인의 무리)을 구분하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25:31-46). 여기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즉 굶주리고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입니다(25:40, 45).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정성껏 섬기는 일은 사실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25:35-40).
한편, 그런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한다면, 사실 주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42-45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25:40, 45)라는 표현은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일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도 중 어려움에 처한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베푼 작은 친절과 자비의 행동을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귀한 섬김으로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를 주님은 자신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로 여기십니다. 지극히 작은 한 성도를 향한 친절과 관심이 곧 예수님을 향한 섬김이란 말씀을 여러분은 받아들이고 있나요?
여기서 혹시 마태가 행위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어지는 26장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 사함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26:28). 그러므로 마태를 '행위구원론자'로 분류하는 것은 그저 근거 없는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뜻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이며 또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께 하지 않은 것일까요? 이는 믿음과 행함 간의 상관관계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완전하여 구원받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살아 있어 삶 가운데 어떻게든 표현되고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인생 가운데 아름다운 결실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마7:15-27).
우리 삶이 완벽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삶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함으로부터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열매를 통해 믿음의 진정성이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약2:26). 바로 그런 뜻에서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 특별히 어려움, 낙담, 좌절, 실망에 처해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느냐가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를 드러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0, 45).
기도: 영적으로 깨어 최종 결산 보고를 준비하며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섬기게 하소서.
[목요일 4월14일] 음모, 배반, 체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l 본문: 마태복음 26:6-75
해설: 오늘 본문은 베다니에서의 도유 사건(26:6-13), 가룟 유다의 배반(14-16절),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언(31-35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36-46절), 체포 장면(47-56절)과 산헤드린(공회)의 불법적이고 조작된 심문(57-68절), 그리고 베드로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저주의 맹세까지 해 가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 부인한 일(26:69-75)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구약이 명령하는 유월절 식사에 근거하여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제정하시는 장면(26:17-30)도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만찬은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과 맞물려 있는 유월절(출12장; 13:15 참조) 식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상징하는 잔에 대해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26:28 [20:28; 사53장 참조])라는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이어지는 마태복음 27:32-56에 매우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대목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주의 만찬 구절입니다(26:17-30, 특히 26-29절)!
주의 만찬 구절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여러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특별히 26-29절에 근거해서 다음 세 가지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입니다(26:28). 우리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대신 치룸으로써 그를 주와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 죄 사함이 주어집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게 합니다(26:29). 아버지의 나라에서 주님과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시게 될 그 때를 내다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에 관해 말하면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고전 11:26).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은 지금 우리 삶에 있어 여전히 중심 사건이요(고전 2:2; 갈6:14), 장차 있을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내다보게 하는 사건입니다(마26:29).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과 섬김의 제자도의 궁극적 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주의 만찬을 베푸시는 과정에서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올리는 장면(26:27)이 그저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의 일부였던 감사 기도와 동일선상에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올리셨다는 것(27절)은 바로 자기 죽음에 대해(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서 이루실 일에 대해)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고 고난이 종식될 때 감사하지만,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올린 "감사"는 자신의 고난을 바로 앞에 두고 드린 감사요, 자신의 희생과 고통과 죽음을 전제로 하는 감사입니다(39절).
이 의미심장한 만찬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는 우리에게 희생과 섬김의 궁극적 본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우리들 감사의 내공 확장을 요청합니다.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상황이 개선되고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생과 섬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회복될 때, 우리는 지속되는 고통과 손실의 경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신 주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감사함과 감격함이 있나요? 당신의 희생과 섬김과 고난을 통해 교회가 회복되고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면 당신은 손해 보고 고통받는 중에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나요?
기도: 주의 십자가 은혜로 제 영적 심장 다시 뛰어 주님 가신 섬김과 희생의 길 충성되이 따르게 하소서.
[금요일 4월15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l 본문: 마태복음27:1-61
해설: 마태복음 27장의 시작 부분은 산헤드린(공회)이 새벽부터 모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총독 빌라도에 그를 넘겼음을 보도하며 시작합니다(1-2절). 그리고 유다의 비극적 최후가 묘사됩니다. 그는 후회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3-10절). 이어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 받으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11-26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름 아닌 시기심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자신에게 넘겼음을 빌라도는 간파했습니다(18절). 그러나 예수를 석방했다가는 민란이 날 수도 있다는 정치적 판단 하에 빌라도는 폭동을 주도했던 바라바를 석방하고, 무죄한 예수에게는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24-26절).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자 물을 갖다 손을 씻는 퍼포먼스까지 합니다(24절).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그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행4:27 참조). 빌라도는 그런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결백과 무죄함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불의를 용인하고 산헤드린의 압박에 타협한 일이 다 없어지나요?
곧이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마27:27-31). 가시 면류관은 예수님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었고, 그를 거짓 왕으로 모욕하는 병사들의 조롱은 그에게 심리적 고통을 더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마치 가짜 왕인 듯이 모욕과 희롱을 받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골고다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32-44절)과 임종 및 그때 벌어진 놀라운 일들(45-56절)에 대해 기록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아리마대 출신의 부자로 예수님의 제자인 요셉이 용기를 내어(58절) 정성껏 주관한(59-60절) 예수님의 장사(57-61절)에 대해 기록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고대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고통스러운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이 가져오는 극한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벌겨 벗겨진 채로 나무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극도의 수치와 모욕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사형수의 배설 장면까지 군중에게 여과 없이 공개됨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을 상징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갈3:13; 신21:23 참조)이란 도식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굳이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죽이고자 애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자동적으로 가짜 메시아로 '판명' 나게 됩니다.
한편, 로마인의 관점에서, 십자가형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정치범의 비참한 최후를 뜻했습니다.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십자가 처형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의 운명을 공개적으로 시연하는 공포정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이 너무나 잔혹했기에 친구와 교제하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금기시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십자가의 죽음은 처절한 실패자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대신 그 죽음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대제사장들(주: 현직 대제사장 및 대제사장을 역임한 일가친척들)을 위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27:42).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의 아이러니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노릇을 하는 가짜 메시아로 조롱 받는 예수님이 실은 이스라엘의 참 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남을 구원한다고 큰소리쳤으나 실제로 자기 목숨마저 지키지 못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려 구원을 이루십니다(고전 1:22-24 참조)!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형을 집도하던 로마 병사들을 무력과 강압으로 쳐부수며 보복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들마저 하나님 백성이 될 기회를 주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아이러니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를 발견하며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대면합니다.
기도: 자신을 버림으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주신 주의 은혜의 강에 깊이 잠기게 하소서.
[토요일 4월16일 & 부활주일 4월17일]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의 명령 l 본문: 마태복음 27:62-28:20
해설: 마태복음 27장의 맨 마지막 부분인 62-66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대처에 관해 기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했던 것을 기억하고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 간 후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일을 막고자 빌라도의 허락 하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무덤 주변을 철저히 지키도록 조치합니다. 아울러 돌을 인봉하여 아무도 묘실에 접근치 못 하도록 추가적인 안전장치까지 해 둡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의 큰 명절 기간 중에 맞이하는 이 안식일에 이같은 조치를 시행한 것은 그들이 얼마만큼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마28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인 28:1-10은 안식 후 첫 날 새벽(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여 주의 천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된 사건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그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합니다. 주님은 이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정에서 여인들의 진술은 그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답니다. 여성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일은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가 친숙한 문화나 우리들의 선호사항에 갇혀 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 삼으신 것은 부활 기사의 진정성을 잘 보여줍니다. 만일 어느 누군가 부활 기사를 창작하려고 했다면 (이 여인들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 남성 중에서 존경받고 신뢰가 갈 만한 인물(회당장? 바리새인? 혹은 제사장?)을 부활의 첫 목격자로 삽입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단락인 28:11-15는 앞선 27:62-66에서 연결되는 내용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시에 일어난 놀라운 일들에 대해 경비병들의 보고를 들은 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군병들을 매수하여 그런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사실을 덮고 진실을 왜곡하기로 결정합니다. "너희[경비병들]는 말하기를 그[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28:13). 이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병사들의 보도에 따라 자신들의 그릇된 신앙과 신학을 조정하려 하지 않았고 도리어 뇌물로 병사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고자 애씁니다. 이들에게도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거짓을 퍼뜨리는 일에 몰두합니다.
셋째 단락인 28:16-20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시는 장면을 생생히 묘사합니다. 전에 유대인을 향해 나아가도록 명하셨던 주님(10:5-6)은 이제 열 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향해 복음 들고 나아가 열방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십니다(사 42:6; 43:9-10; 44:8 참조). 사도들은 온 족속을 예수님의 제자 삼아야 합니다. 열방이 들어야 할 복된 소식은 사도들 스스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이(그리고 우리가) 선별적으로 좋아하는 가르침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금지가 주님의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20). 그리스도의 편재(omnipresence)를 전제하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숭고한 인간이나 이상적 인간에 머무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는 참 사람이시지만 또한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배 받기 합당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명령은 절대 권위를 지닙니다. 주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성도와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 위에 절대적 권위를 갖는 말씀입니다. 제자 삼는 일에 힘쓰며, 주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나누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인생,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 메시아가 오셨음을 드러내 주는 제자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 쉽게 낙담하고 지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주의 약속 굳게 붙잡고 오늘도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모델하우스다운 모습으로 든든히 세워질 때까지 절대 낙담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님과 함께 나아갑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이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기도: 주님이 늘 함께하심을 믿고 주의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고, 적용하고, 전하는 제자 공동체 이루게 하소서
맺는 말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 모여 예배 드립니다! 2022년 4월 17일 부활주일에 교회 공동체와 함께 모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축하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상황이 개인과 공동체에게 매우 어려울 수 있으나 부활하신 주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의 본질을 되찾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힘겨운 상황 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7-58)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