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 수요일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박사님께서 캘리포니아 터스틴에 있는 자택에서 사랑하는 아내, 자녀,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87세였습니다. 낮에 찬송과 기도와 말씀 낭송을 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새벽 3시 50분 소천하셨습니다.
역동적인 설교가이자 전도자인 오르티즈 박사는65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런 그는 1934년 7월 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산토스 루가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재봉사인 콘셉시온 마르토스 Concepcion Martos 여사와 철도 기술자이며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 힐라리오 오르티즈 Hilario Ortiz 사이에서 다섯 번째,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4세부터 주일학교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6세에 이탈리아 이민자들로 구성된 오순절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65년 이상 지속된 목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는1954년에 하나님의 성회 신학교인 리오 데 라 플라타 성경 학원Instituto Bíblico Rio de la Plata를 졸업했습니다. 설교자가 되겠다고 결심함으로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교단 신학을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다녔던 교회에서 안수도 못 받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벨레즈 사르스필드 스타디움Velez Sarsfield Stadium에서 전도집회를 하는 미국 전도자 타미 힉스Tommy Hicks부흥사의 개인 비서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힉스 목사는 스타디움을 메운 이들에게 성령 사역을 통하여 놀라운 치유와 예언 사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르헨티나 메스컴이 연일 기적에 놀라며 대서특필했고 부통령과 대통령 영부인도 기도를 받는 등의 역사를 일으켰던 분으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오르티즈 박사는 힉스목사님의 망또를 받고는 정글로 들어가 전도사역을 감당합니다. 정글에서 사모님도 만났고, 신혼여행도 그 정글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글에서 끌어내어 당시 최대 교회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에 있는 교회인 믿음의 성전 교회 El Tabernaculo de la Fe의 목사로 1966년부터1977년까지 사역하시도록 합니다. 이때 아르헨티나에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면서 성령사역을 같이 하는 타 교단 교회들과 교류하면서 초교파적인 연합사역을 했고, 성령에 대하여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제자 훈련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참된 제자화를 시키지 못하고 예배 때 설교만 하는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성장의 열쇠는 사람들을 위임하고 권한을 부여할 때온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고아원과 같고 목사는 고아원장일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제자화를 위한 소그룹 만들기를 주창했던 그에게 당시 교회와 교단은 이단으로 정죄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주를 위하여 이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세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그였으나, 이제 제자 훈련으로 더 깊어 지면서 그와 그의 교회는 국제적으로 더 유명해집니다. 1974년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목사가 주도한 스위스 로잔 대회에서 제자 훈련에 관하여 소개하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크고 작은 교회, 대학, 컨벤션, 세미나 및 기타 행사에서 여행하고 가르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1978년 그는 세계에 더 많은 요청에 잘 응하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이사합니다. 그리고1983년 그의 사역을 돕기 위한 후원조직인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사역회 Juan Carlos Ortiz Ministries 가 설립됩니다. 후에 세계에서 최고만을 고집하는 가든 그로브에 있는 수정교회의 담임목사인 로버트 슐러 박사 Dr. Robert Schuller 의 초청으로1989년에 수정교회에서 스페니쉬 버전 능력의 시간을 섬김니다. 그의 설교가 전 세계로 전해졌고, 또 수정교회에 스페니쉬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는 세계에서 최고로 매스컴을 잘 사용하는 수정 교회에 있었지만 정작 교회를 개척할 때는 교회 주변 집들을 일일이 사모님과 방문하며 전도를 하는 본질을 행합니다.
2000년 피부암이 발견되어 교회를 은퇴한 후에 신학대 학장직을 저와 함께 팀사역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개척했던 교회는 이제 3대 목사로 그의 사랑하는 친구 단테 게벨Dante Gebel 을 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대했고 지금은 7000여명의 출석교인과 전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오르티즈 박사는 또한 세계 언어로 10만부 이상 팔린 "제자입니까? Disciple," "인간 영혼의 울림 Cry of the Human Heart," "예수님과 오늘 살기 Living with Jesus Today," "하나님께서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God is Closer than you think" 등 여러 책을 저술하고, 한국에도 자주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저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하나님의 은혜로 쉐퍼드 대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문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공부하기 위하여 1990년 1월 1일에 풀러 신학대에 오면서 몇 가지 기도를 했었습니다. 영어를 잘하고 세계적인 분을 통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멘토를 붙여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2년 매일 기도했지만 응답되는 것 같지가 않아서 슬그머니 기도를 내려놓았었습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2005년쯤부터 쉐퍼드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오르티즈 박사님의 강의를 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봄부터 우리는 매주 목요일 커피숍에서 만나 비전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부터는 그를 신학대의 학장으로 모시고 제가 부학장으로 팀을 이루어 섬기면서 우리는 dynamic duo가 되었습니다. 그와 저는 쌍둥이처럼 설교하고 강의 했고 통역하면서 강력한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그의 수업 통역을 하면서 저는 자주 감격속에서 울었습니다. 그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의 그를 향한 사랑의 깊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주님께 비밀리에 기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의 기도는 "오르티즈 박사님의 헌신된 영적 삶과 제자 훈련 사역은 실로 압권이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모델을 없습니까?"였습니다. 과연 그런 기도도 응답해 주실까 싶은 것이었지만 저는 순수하고 간절하게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이 비전 멘토링입니다. 실로 비전 멘토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비전 멘토링을 선물로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도 잊었던 두 기도 제목을 오르티즈 박사를 통역케하시고, 멘토링을 받게 하심으로 한꺼번에 최고의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풀러와 아주사 등의 학교에서도 부르심을 받았지만 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년간이나 그를 독차지하여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가 깨닫고 실천했던 제자 훈련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하심으로 비전 멘토링을 그 위에 한층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배웠던 쉐퍼드의 수 많은 제자들이 전 세계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가 피부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시고 수정교회를 은퇴하신 때는 2000년 경이셨습니다. 그리고 21년이 지나셨습니다. 그때 그는 처음 듣는 죽음 판정에 당황했지만 그렇게 설교하던 천국에 마침내 가게 된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주님과 어머니를 뵐 생각에 기쁨으로 충만하였답니다. 그 이야기를 사모님께 기쁘게 했다가 "그럼 남아있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천국가는 것에 신났느냐?"는 책망을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가 그렇게 가시기를 소원하셨던 천국에 가셨기에 기쁨으로 그를 보내드립니다. 또한 망또를 입혀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제자들, 비전 멘티들을 더 신실하게 양육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