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온 세상이 들썩거리며 우왕좌왕한지 벌써 반 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 전염병이 pandemic이라는 타이틀을 따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전염병이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 바람에 그동안 익숙했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 너무나도 불편하기만 하다. 처음에는 몇 개월만 지나면 되겠지 했는데, 최소한 1년 이상은 더 견뎌야 한단다. 코로나19 폭탄에 의해 파괴된 일상의 길이 의외로 심각하다. 그래서 모두들 이 사태 이후 우리의 일상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될지 염려한다. 아무도 그 길이 어떨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도 코로나19 폭탄에 큰 부상을 입었다. 마치 교회가 박해를 받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교회 예배의식이 중단되었다. 과거에는 예배를 드리다가 박해자에 의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박해자는 없지만, 예배 의식에 참여했던 교회 식구 중에 코로나19에 감염되어 병원 신세를 지거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래도 그렇게 되더라도 회중예배 형식으로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순교자 정신으로 참여하려는 경우도 초기에는 종종 나타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교회 예배당에서 회중이 모여 드렸던 예배 전통을 중단하고, 모두 흩어져서 각 가정 단위로 예배를 드리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전에는 유튜브에 나오는 예배 영상이나 기독교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예배 영상을 활용해서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배는 혼자만의 예배가 아니라 공동체의 예배여야 한다는 나름의 확신이었다. 이 확신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신앙 생활이 혼자만의 고독한 여정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여정이어야 바른 신앙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어찌 틀렸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부정적인 현상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내가 싫든 좋든 상관없이 교회 식구들이 각자 개개인의 처소에서 인터넷 영상이나 방송 영상을 켜놓고 예배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외부인의 시선이 사라진 자신만의 자리에서 TV나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개개인은 나름의 해방감을 누리며 영상 예배에 참여한다. 회중 가운데 일원으로 드렸던 예배 의식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그런가 하면, 굳이 내가 속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의무감(?)도 약해진다. 다른 교회의 예배에 들어가는 자유도 경험해 본다. 가족 외 다른 이의 시선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에, 훨씬 느슨한 마음으로 예배 영상 앞에 앉아 있다. 전에는 아이들이 스마트폰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손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만지작거린다. 마치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이 사태가 진정되어 정상 예배로 돌아가면 이런 한시적인 현상은 사라지고 다시 회복될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서로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면서 교제하는 맛이 훨씬 좋으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교회는 그동안 잃었던 예배의 동력을 회복하려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각 가정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녀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전에는 아이는 아이들 대로 연령에 맞는 예배를 드리고, 어른은 아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예배를 드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린 아이들 가정은 부산함 때문에 정신이 없고, 좀 큰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딴 짓 하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예배가 스트레스다. 다 큰 아이들은 아예 예배 영상 앞에 앉아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별로 예배 영상을 따로 만들어서 송출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 집에 같이 있으면서 부모는 거실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현상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무엇인가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비취지 않는다.
교회마다 있는 소그룹 모임도 모일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명 이하의 모임은 가능하다고 해서 모이는 그룹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소그룹 모임이 더 위험하단다. 모임 때 지켜야할 수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동안 각 교회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소그룹의 진가가 이번에는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그룹 리더들이 자신이 섬기는 멤버들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지만, 그것도 그리 활력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그동안 가깝게 지냈던 이웃도 함부로 들이지 못하고, 방문하지도 못한다. 혹시나 서로에게 해를 줄 수 있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나 하나 때문에 다른 가정에 불행이 닥칠 수 있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공포심 때문에 아니라, 그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교회 시스템이 모두 셧다운되어 버린 상태다. 흩어져 버린 교회다. 교회가 건강하기 위하여 흩어져야 한다고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그렇게도 주장했던 대로 흩어진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흩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 버렸다. 이제는 모두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형편이다.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여기저기에 흩어져 땅에 떨궈진 풀포기 같은 교회 식구들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서 살아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 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선지자 이사야는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더 이상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저들은 최상의 제물을 아주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가증스럽고 역겹다고 하셨다. 그들이 성전 밖에서 살아간 일상의 삶이 악하고 불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피를 보았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삶은 의롭지 않았고 더러웠다. 한데 그러한 손으로 최상의 제물을 드린다 했으니, 어찌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수 있었겠는가?
이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전 예배의식이 의미가 있으려면, 예배하는 자들의 일상이 말씀에 충실한 삶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메시지다. '삶이 없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 이 메시지는 모이는 것에 집중하며 그것을 위하여 전전긍긍하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주님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그분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발견해야 한다. 지금은 흩어져 있는 교회 식구들을 모으는데 신경을 쓰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순종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고 있는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가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놓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회중 예배든 영상예배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수가 성 여인이 참 예배에 대하여 묻자,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던 주님을 다시 떠올려 보자. 예배당에서 드리든, 영상으로 드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참 예배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 터널은 끝나기 마련이다. 흩어졌던 식구들도 돌아오고, 모이지 못했던 소그룹도 모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모인 회중과 소그룹은 어떤 신앙의 자리에 있을까? 마치 코로나 사태 때 모든 것이 정지된 기간이 찍혔던 필름을 잘라내고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를 붙여 편집하듯이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수 있을까? 아니다. 그 잘려진 필름도 유용하다.
아무 쓸모 없어서 버려야 할 것 같은 코로나19 기간은 각 가정이 제대로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그동안 집회 중심의 '집단적 영성 사역' 프레임을 벗어난 새로운 교회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모이는 것에 집중하다가 흩어져 있는 이 상황이 굳어져 버릴까 염려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이 정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교회가 된다면 어떨까? 그동안 건강한 교회가 어떤 것인지 토론하고 연구했던 결과들이 많이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기존 교회에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많았는데, 이번 상황은 실제로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기존 교회의 그 어떤 전통도 관례도 통할 수가 없는 현 정황 때문에 불안과 당혹스러움에 휩싸이지 않고 좀더 교회의 본질에 시선을 집중하면 어떨까? 그동안 익숙했던 '대면 문화'로는 더 이상 이 상황 속에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색하기만 한 '비대면 문화'방식에 친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지나갈수록 화상으로 대화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진행이 될 것이다. 비록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게 될 때, 그 만남의 감격이 더해지려면 이렇게 화상으로라도 만나야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 할거인가?
교회는 모여야 한다. 모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모임이 될 것이다. 그 모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인지 아니면 밝은 빛의 모임이 될 것인지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과거에 우리의 모임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정직하게 돌아봐야 한다. 지금까지 얘기한대로, 모이는 것에 급급하지는 않았는가 살펴야 한다. 흩어지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어정쩡하고 불확실한 이 기간이 우리에게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만약에 지금 이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는 시도를 한다면, 아마도 언젠가 다시 모일 때, 지체들의 마음 가짐이 달라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흩어져서 제대로 살아내는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도전과 질문을 마음에 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사태가 마무리가 될 때면, 그들은 그 도전과 숙제와 감격을 나누기 위해 모이려 할 것이다. 모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 수준을 가늠하던 과거가 아니다. 그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낸 일상의 예배에 익숙해진 지체들이 모이는 것이다. 함께 모일 그때, 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확인하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흩어진다면, 제대로 모일 것이다. 제대로 흩어지기 위하여 제대로 모일 것이다. 교회는 흩어져 있는 교회 식구들이 어떻게 하면 잘 흩어져 지낼 수 있는지 연구하고 도와야 한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태 때문에 어정쩡하게 있던 교회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안지영,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