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하는 시대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2017년 어느 국회의원의 공항 입국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좌관을 보지 않고 가방을 그가 있는 쪽으로 밀면서 공항을 나왔죠. 일명 농구 용어인 "노룩패스"(No Look Pass). 걸음걸이도 상당히 거만하게 보였습니다. 보좌관은 그 가방을 집으러 조금은 뛰며 허리를 조금 굽혀 인사하는듯했습니다. 그 국회의원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언론에 오르자 '그게 왜 뉴스거리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했다 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국회의원은 보좌관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는 관습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겠죠. 이 장면은 어쩌면 그야말로 '권위적인 구시대 리더'의 전형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리더가 받아야 할 것은 시민들의 냉랭함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그즈음에 지금 대통령이 보여준 '섬김의 리더십'이 화제였습니다. 대선 토론하는 모습에서부터, 사인을 받으려는 아이가 종이를 찾지 못하자 쪼그려 앉아 기다려 주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죠. 그동안 정치진영에서 보지 못했던 리더십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의 인품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펙 보다 상대방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자세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죠. 새로운 시대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자세를 낮추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그런 리더십을 원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이야기는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지 보여줍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을 다른 모든 대신 보다 높여 주었을 때, 권력의 맛을 보게 되죠. 그리고는 유다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유다인 전부를 전멸하고자 합니다.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아 죽이려 합니다. 권력 남용이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이의 최후는 자명합니다. 그가 그 나무에 달려 죽죠. 그러니 권모술수는 버려야 합니다. 권력의 자리에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입장은 버려야 합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지요. 한 번 잡은 권력, 영원한가요? 아무리 화려한 꽃송이도 언젠가는 지듯이, 권력 또한 유통기한이 있음을 안다면, 거만할 수가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꽃잎 떨어지지 않게 하는 법이 없듯이, 영원토록 권력 잡는 법도 없지요. 이 간단한 진리를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떠한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2. 표리부동하지 않는 리더

율곡 이이가 쓴 『성학집요』의 표지에는 "성인이 갖추어야 할 배움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성인 또한 배워야 합니다. 배움에 끝이 있을까요? 오늘도 배워야 합니다. 율곡이 임금에게 말합니다. "예가 엄격하지 않고 마음이 공정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말과 선한 정치라도 모두 한갓 공허한 조문(文具)이 될 뿐입니다." 여기서 조문으로 번역된 "문구"의 사전적 의미는 "실속이 없이 겉만 꾸미거나 형식만을 차림"이라는 뜻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날마다 마음을 다지는 그런 '심지가 견고한 자'이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늘 언제나 이리저리 휘둘리게 마련이며, 인기를 얻으려 사람들에게 좋은 것만을 보이려고 자신의 겉모습을 꾸미기 마련일 겁니다. 그럴수록 속과 겉은 어긋나며, 그 간극도 점점 더 벌어지겠지요. 하지만 이내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며, 급기야는 아무런 정체성의 불편함도 갈등도 없이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표리부동(表裏不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용』에서 "군자는 안으로 살펴서 꺼림칙함이 없고, 뜻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속마음이 다르면 껄끄럽거나 부끄럽지요. 자신이 하는 일을 속마음의 불편함 없이 했으면 합니다.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선한 일을 할 때는 죄책감이 없지만 나쁜 일을 하면 죄책감이 발동합니다. 나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주위를 살핍니다. 그 말은 타자를 의식한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본인이 타자를 의식합니다. 그 이유는 타자가 자신의 나쁜 행동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겉과 속이 다름을 어느 날 문득 보고 깨달을 때 사실 창피하죠. 그동안 이렇게나 다르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을까요? 뭔가 조금 더 나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랬겠죠. 하지만 그런 이중적인 모습 속에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삶의 만족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누구든 속마음을 살피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리더라면 더 그래야겠지요.

3. 열린 마음을 가진 리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 대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묻습니다. '너의 조선은 무엇이냐?' 세종은 '전각을 지어 경전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 전각의 이름을 '현명한 자를 모은다'는 "집현전'으로 받습니다. 그 집현전이 하는 일은 "권력의 독을 감추고 칼이 아닌 말로써 설득하고 모두의 진심을 얻어내어 모두를 오직 품고 하여 방진의 일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2, 3, 4, 5, 6.. 모두가 제 자리를 찾고 제 역할을 하게 하는 그런 조선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릴 것이옵니다."라고 합니다.

세종은 '문(文)'으로 조선을 다스리겠다 합니다. 서론 토론을 하면서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지요. 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되려면,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토론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토론이 허용된다는 것은 일방적 지시가 아닌 소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열린 태도가 있을 때 그 공동체 혹은 국가는 희망이 있을 겁니다.

니체는 "불쌍한 양들"은 대장에게 '항상 앞장서기만 하면 당신을 따를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고, 불쌍한 대장은 반대로 '항상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너희를 이끌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합니다. 양들은 따라가기만 하고 대장은 앞서가기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지요.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지체의 모습 또한 아닙니다. 항상 따라가기만 하는 이들은 주체성이 상실될 위험이 있으며, 항상 따라오게만 하는 지도자는 독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닫힌 구조에서는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리더는 그런 자리에서 아부하고 아첨하는 이들의 말에만 현혹되지 말고 직언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절대권력은 거리를 둡니다. 경계를 세웁니다.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구성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소통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 이러한 리더가 있으면, '공동체가 바뀔 것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진짜 함께하고 싶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 같다'는 어떤 느낌적 느낌, 생각적 생각, 희망적 희망을 하게 됩니다.

4. 자발적으로 자기를 제한하는 리더

신호등 신호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생활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만이 항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만일 항시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권력이 돼 버립니다. 권리가 권력이 되는 순간 억압이 등장하지요. 갈등이 생깁니다. 교만이죠.

사람은 누구나 "주체"가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체를 "독보적 존재" 혹은 "선두 주자" 아니면 "리더"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누구나 각자 자신의 삶의 분야에서 우뚝 서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이러한 마음을 지나친 욕심이라고 폄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한 마음이 드러나는 양상은 우리가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보적 존재로 서려는 생각이 강하다 보니 사상이나 삶의 행보나 지향하는 바가 거의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서조차도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지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대안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만의 그러한 지존적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는 인간 속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는 진보도 보수도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체가 "지체"가 되지 않는 이상 "주체의 죽음"은 자명합니다. 지체가 된다고 해서 주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나는 나의 자리를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용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 답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이상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도,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도 의미 없을 뿐이지 싶습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마저도 스스로 제한하셔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홀로 존재하셨던 신이 자신 속에 타자의 세계를 만드셨고 그 세계 속에 '지체'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과 '높고 높으신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는 이 표현은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서 높아지려는 삶의 욕망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미욱하리만치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자신을 제한한들 인간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듯합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자기 제한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야말로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아닐까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예수 믿는다"는 의미 아닐까요?

허공을 헤매는 풍선에는 우는 아이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그러나 손에 있어야 할 것이 더 이상 자신의 손에 쥐어있지 않아 슬프지만 세상에는 손이 닿지 못하는, 아니 닿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되면, 그것 또한 큰 배움일 겁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은 바라보면 됩니다. 손 내밀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은 잡으려 하면 안 되겠죠. 그것은 욕심이요 추한 고집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움켜잡고 살 수 없지 않은가요. 때론 의지적으로 놓아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떠나보내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5.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리더

한 번 실패한 것을 다시 한번 더 하는 것은 '소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신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더 하는 것은 '어리석은 고집'이죠. 월드 시리즈에서 그렇게 해서 아마 두 해 연속으로 우승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다저스 투수 운영을 몇 년째 같은 패턴으로 하는 감독을 보면서 '스스로 변하는 것도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리더는 큰 크림을 그리며 변화를 수용할 줄 알며 공동체 내 어지러운 질서를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들어봅시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의 본성 가운데 변화보다 더 사랑스럽고 친근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무가 변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운물에 목욕할 수 있는가? 음식물이 변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가? 그 밖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변화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너 자신의 변화도 그와 똑같은 것으로 보편적 본성에는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하는가?" 누구보다 리더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자신 또한 바뀌어야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리더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변화시키겠습니까? <시사 자키 정관용입니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인천대 조동성 총장이 인터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21세기에는 5가지의 조직이 생긴다고 합니다. 첫째는 "매트릭스 조직"으로 기능을 지닌 본사와 현장이 떨어져 있어서, 현장에 필요가 있을 때, 본사가 기능인을 현장에 파송했다가 일이 끝나면 돌아오는 형태라 합니다. 둘째는 "프로페셔널 조직"이라 합니다. 피라미드를 왼쪽으로 눕히면 리더와 평직원의 위치가 수평이라는 것이에요. 상하가 없고 역할 분담만 있다는 것이죠. 세 번째는, 한 번 더 피라미드를 돌리면 리더는 아래에 있고 실무자가 위에 있으며 고객은 그 위에 있는 역피라미드 형태가 된다는 거에요. "서비스 조직"이 이런 모습이라 합니다. 네 번째는 "스파게티 조직"인데 서로 연결되어있는 모습이고, 다섯 번째는 "피자 조직"이라 합니다. 피라미드를 위에서부터 누르면 피자처럼 납작해지죠. 그러면 정점도 없고 중간관리자가 없게 된다는 거죠. 이 다섯 가지 모델 중 앞으로는 다섯 번째 피자 조직으로 바뀔 것이라 합니다. 실무자가 전문화되며 "실력" 위주로 간다는 것이지요.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을 접했을 때 변하는 과정처럼 변한다는 것이에요. "충격, 분노, 체념, 적응". 그런데 거기에 "혁신"이 덧붙여진다고 합니다. 체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대처한다는 것이겠지요.

공동체가 정체되어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해 봐야겠지요. 그런데 변화를 시도하거나 혹은 변화를 시도하지 않거나 그 목적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공동체는 희망이 없을 겁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각오로 공동체를 섬겨야 그 공동체가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예기치 못한 현실에 단순히 적응만 해서는 안 되고 혁신으로 나갈 수 있는 리더가 21세기형 리더라는 것이지요.

6. 감동의 이야기가 있는 섬기는 리더

백인 경찰이 흑인을 죽인 사건으로 미국이 시끄럽습니다. 이로 인해 폭력 시위가 계속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며 교회 앞에서 성경을 높이 들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들어 '자유'를 상징했다면, 그는 성경을 들고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요? 자신의 행동을 성경이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까요? 자신은 성경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시인 박노해가 그랬습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능력"이라고 말이죠. 사람을 감동 시키는 것, 어디 쉬운가요. 어디 말만으로 할 수 있는가요. 삶으로 보여야 그 지도력을 따르겠지요. 트럼프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그의 삶에 감동 스러운 이야기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국민에게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는 감동 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모습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온 나라 저무느니" 정희성 시인이 오래전 「청명」이라는 시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내뱉은 말인 것 같은데 지금 코로나 19를 경험하는 우리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봄은 왔건만, 코로나 19로, 경찰의 살인으로, 그에 따라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로, 나라가 저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를 멈춰 줄 리더가 필요한데 그러지를 못하니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코로나 19 이후 군림하는 리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 리더는 전지적 작가 시점 혹은 천동설적 자아관, 즉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는 이들입니다. 이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새 시대의 리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리더가 등장해야 합니다.

어릴 때 첨성대와 에밀레종 근처에서 자란 정호승 시인은 외삼촌에게서 에밀레종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이 되려 하지 종을 치는 나무 봉인 종메는 되지 않으려 한다는 거에요. 이유는 종메가 되면 종을 칠 때마다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주목받는 종이 되려 하지 부차적인 종메는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종 보다는 종메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때리는 종메 뿐만 아니라 맞는 종도 아프겠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화려한 조명만 받으며 주인공으로만 살려고 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자는 것일 겁니다.

이제는 정말로 소위 말하는 '섬기는 리더'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의 얼굴과 눈동자와 그의 삶의 표정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듣고, 허리 숙여 섬기는 리더 말입니다.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그런 리더를 요구하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을 '강제적'(?)으로 요청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동식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