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병약했지만 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 말씀과 성령께 붙들린 젊은 신학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모든 영역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한 도시를 성경이 다스리는 모범 도시를 만들기 위해 평생 제네바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 생애를 불태웠던 하나님의 사람 존 칼빈, 오늘날 이런 부흥과 개혁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많이 오기를 기도하며 존 칼빈을 소개한다!
존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체계를 세우고 완성한 뛰어난 종교개혁가이자 심오한 성경주석가, 조직신학자, 기독교 사상가였으며 불결하고 부도덕했던 제네바를 성경적 부흥운동을 통한 개혁으로 성경이 다스리는 세계적인 모범도시로 만들어 유럽의 영적 지도를 바꾼 인물이었다.
칼빈은 1509년 불란서의 노용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영국에서는 헨리8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독일에서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부름을 받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가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대성당의 공증인과 교회 법정의 등록 사무관이었던 아버지는 칼빈이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가 카톨릭 교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들을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신부가 되기 위해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계획을 바꾸어 유명한 오를레앙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고,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해 헬라어와 라틴어 원서들을 많이 읽었다.
칼빈의 회심과 기독교 강요
신부와 법학자와 인문주의자의 꿈을 키워가던 칼빈은 그의 나이 24살에 갑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한다.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으면서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깊은 인식, 바울 서신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감으로 깊은 평화를 맛보고 성령 안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특히 루터의 글을 많이 읽었고 그 영향으로 카톨릭과 결별하게 된다.
핍박을 피해 스위스 바젤로 피난을 갔다가 거기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그 유명한 걸작 '기독교 강요' 초판을 펴내게 된다. 기독교 강요는 그 후 20년 동안 8회의 개정판이 나왔는데 사도신경을 뼈대로 써나간 기독교에 대한 탁월한 변증서이자 조직신학 책으로 이 책에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종교개혁 원리가 명백히 표현되었고 성령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과 참된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께서 영적 각성과 부흥을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했다.
윌리엄 파렐과의 만남과 제네바 개혁과 부흥
칼빈은 기독교강요 출판으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조용한 학자로 살기를 원해 조용한 마을인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에 제네바를 들렸다가 제네바에서 4년간 개신교 혁명을 이끌던 파렐을 만나 '체계 있는 성경 이론으로 종교개혁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하다' 면서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받게 된다. 그는 '조용히 학문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는데 파렐은 "당신이 만일 주님의 일을 돕지 않는다면 당신과 당신의 학문을 주께서 저주하실 것이오." 라고 불같이 경고했다.
후에 칼빈은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가 아닌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주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 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라고 그때의 상황을 기록했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는 토사물과 포도주 냄새와 인분과 쓰레기로 악취가 가장 심한 도시였고, 독일과 프랑스와 이태리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 범죄자, 정치난민, 간첩, 몸 파는 여인들, 빈민들로 가득한 부도덕한 도시였다.
칼빈은 파렐의 종교개혁을 돕기 위해 제네바에 남게 되었고, 제네바에서 성경교사와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모범도시를 만들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침으로 제네바를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너무 엄격한 도덕 기준을 밀고 나감으로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추방되어 3년간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다.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동안 칼빈은 목회를 하면서 목회도 배우고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간했고, 첫 성경 주석인 로마서 주석을 출간하기도 하면서 종교개혁신학을 집대성할 기회를 얻었다. 다시 제네바에 초청을 받고 돌아와 제네바를 장악해 제네바의 목사 겸 지도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성경적 개혁을 추진함으로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거룩한 도시, 모범도시로 만들었다. 제네바에 바른 말씀이 선포되자 성령께서 신자들과 공동체에 역사하셔 국가적 회개운동과 놀라운 도덕적 변화와 변혁의 부흥이 일어나게 하신 것이다.
신학자로서의 칼빈
당시 최대의 걸작으로 불리운 기독교강요를 기록했고,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전체를 주석해 책으로 출판했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중심한 칼빈의 5대강령(TULIP)과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를 세웠다.
칼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를 강조했는데 성령 안에서의 절제된 도덕적 생활과 도덕적 의로움을 향한 강렬한 추구를 구원받은 결과로 강조했다.
그는 또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신자는 교회 공동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당연히 교회를 어머니로 여겨야 한다!" 고 가르치며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칼빈 개혁 총정리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삶의 모든 영역(정치, 경제, 교육, 복지등)에 흘러 들어감으로 건강한 신앙이 건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제네바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예배개혁- 교회는 성경 속에 있는 모습으로 돌아 가야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예배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며, 예배의 순수성은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라틴어 예배에서 불어 예배로, 보는 예배에서 말씀선포 중심의 들리는 예배로 전환시켰고, 성가대에 빼앗겼던 어려운 찬송가를 일반 신자들이 부를 수 있는 시편을 내용으로 한 가사전달 중심의 쉬운 곡으로 만들어 찬송을 일반 신자에게 되돌려주었다.
가정과 경제개혁- 하나님 중심의 가정사역을 강조해 가장으로 하여금 출 취하지 말고 가정을 영적으로 돌보고, 열심히 일해 재정적으로 책임지고, 십일조를 내며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저축한 돈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곳에 재투자 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가르쳤다. 금융업을 장려하여 높은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여 빌리는 사람이 이자의 부담 없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했고 스위스 은행을 오늘날 까지도 가장 신뢰 받는 은행으로 기반을 닦아주었다.
복지정책- 제네바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적, 정치적 핍박, 가난을 피해온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이들을 성경적 가르침대로 스스로 일해 자립할 때까지 도와주어 '일하게 하는 복지'를 정착시킴으로 그들로 하여금 제네바와 스위스 발전에 기여하게 했다.
정치개혁-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절대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잘못된 권력은 언제든지 축출 되어야 하며,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서로 견제와 균형을 맞추게 하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구성된 '3권 분립의 체제'를 제안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을 서구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부르기도 한다.
교육개혁과 제네바 아카데미-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목회나 정부의 일을 위해 준비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제네바 시에 자금을 마련해주도록 요청했다. 남학생뿐 아니라 여학생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 성경 뿐 아니라 의학, 과학, 정치, 사회학, 경제학까지 가르침으로 성경과 세상학문과의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 최고의 개혁신학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유럽 전역에서 박해를 피해 우수한 개신교 젊은이들이 제네바로 몰려왔는데 이들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몇 년씩 공부하고 돌아감으로 제네바 아카데미는 전 유럽 종교개혁의 사령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은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유럽 전역에 수많은 대학들을 세우게 됨으로 칼빈의 사상과 개혁과 부흥운동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칼빈의 영향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영국의 청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 화란의 칼빈주의,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에 이르기까지 부흥과 신학의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 당시 유럽과 신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존 칼빈에 대한 연구는 여러 참고서적 중에서 특히 '한홍 목사의 종교개혁 히스토리'를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