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개봉 3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주말 동안 200만 돌파가 예상되는 영화 <조커>에 대해 살펴봅니다. 호아킨 피닉스(조커), 재지 비츠(소피 두몬드), 로버트 드 니로(머레이 프랭클린), 프란시스 콘로이(페니 플렉), 브래트 컬렌(토마스 웨인) 등 배우들의 호연과 함께 토드 필립스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 <조커>는 '악마의 탄생'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죄의 편재성에 대한 사실적 보고서, 영화 <조커>
죄성과 인간: 죄성의 기원은 어디로부터인가?
올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조커>(Joker, 2019)는 슈퍼히어로 코믹스 시리즈 <배트맨>의 메인 빌런 조커의 탄생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국내 평론가 대부분은 <조커>의 작품성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조커 역을 맡은 주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이구동성으로 극찬한다.
기존 잭 니콜슨이나 히스 레져 같은 명배우들이 연기한 조커 역시 관객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번에 호아킨 피닉스가 맡은 조커 연기는 그 사실성과 호소력 측면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전 조커 배역들이 배트맨이라는 히어로와의 대척점에 선 악당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에 공개된 조커 배역은 한 나약하고 가련한 인간이 가족과 동료, 그리고 사회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무너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전체를 통해 순수한 광기와 악의로 가득찬 연쇄살인마가 탄생하는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극심한 좌절과 고통, 그리고 정신병으로 인해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비운의 희생양이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여인 페니 플렉에게 입양되어 그녀의 애인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 여파로 뇌손상을 입어 시시때때로 웃음을 참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얻게 된다.
불우하고 빈궁한 가운데서도 스탠딩 코미디언의 꿈을 키워가지만 아무도 그의 코미디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최악의 코미디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여기에 더해 양어머니 페니 플렉의 과대망상증마저 물려받는 심각한 처지에 이른다.
가족과 사회, 그리고 동료 그 어디로부터도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 아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그의 병증을 놀리며 폭력을 행사하는 세 남성을 지하철에서 총으로 살해한 후부터 비로소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 주도권은 바로 살인과 폭력과 선동을 통해 얻게 된 것이다. 광대 분장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부터 아서는 고담 시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되고, 빈궁하고 억압받고 무시받는 자들의 우상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때부터 아서는 스스로 연쇄살인마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삶의 정황 전체가 자기를 정신병자로, 인기없는 코미디언으로, 멸시받는 하층민으로 몰아가자, 아서는 살인과 폭동을 통해 화려한 복수를 시도한다.
<조커>는 이 우울하고 암담한 과정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이 전율과 고민에 휩싸이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조커의 탄생 과정을 샅샅이 목격하고서도, 과연 조커가 보이는 광기와 그가 자행하는 살인을 아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영화는 아서를 처절한 희생자로 그려낸다. 조커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서 본인이 아니라 죄로 물든 사회 자체라는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죄성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한편으로는 일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반되는 견해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죄성의 기원이 인간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과 사회 전반에 있다는 입장 모두를 수긍하기 때문이다.
죄성과 사회: 사회를 통한 죄의 유전
기독교 교리사 전반을 통해볼 때, 유전설(Traducianism)은 인류가 가진 죄성의 기원을 밝혀주는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인류의 영혼은 아담과 여자로부터 출발해 혈통을 타고 유전되었으며, 죄성 또한 아담과 여자가 지은 원죄로부터 유전되었다는 것이 유전설의 핵심 주장이다.
물론 유전설 내부에도 다양한 양태의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혈통을 통한 죄의 유전이라는 교리적 테제만큼은 대체적으로 별다른 이견 없이 교회들에 의해 수용되어 왔다.
유전설은 이 세상에 죄가 편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죄성이란 유전을 통해 전해지는 인류의 선험적 본질이므로 이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죄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쳐내는 데 유전설만큼 적절한 교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전설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실증되지 않는 영적-형이상학적 관념들을 부정했던 근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삶의 직접적 체험으로부터 인간 본성에 관한 진리를 길어내려 했던 실존철학에 의해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현대 실존철학의 선구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죄성의 기원을 유전설이 아닌 삶의 체험 속에서 발견하려 했고, 이런 그의 시도는 오늘날까지 실존을 중시하는 신학자들 대다수에게 수용되어 왔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죄성이란 유전되는 본질이라기보다, 모든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부여되는 삶의 정황으로 규정된다. 어떤 사람도 살아가는 가운데 타인의 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타인의 죄악이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한 사람의 인격적 존재를 형성하는 것은 삶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본질 개념이 아니라 삶의 정황과 체험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자들이다.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와중에 욕망과 공포, 불안 등에 휘둘려 크든 작든 반드시 비윤리적 행위들을 자행한다.
그리고 이런 비윤리적 행위들은 많은 경우에 그 자신에게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종래에는 집단적으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편만한 죄악이 모든 사람에게 삶의 정황으로 주어지면서, 인간은 죄성을 자신의 실존적 본질로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진단한 죄성의 실존적-현실적 기원이다.
영화 <조커>는 죄성의 실존적 기원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진단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다. 조커로 재탄생하기 이전, 아서는 도덕적이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죄된 삶의 정황은 그가 그렇게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가 분노와 절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결국 그를 조커라는 살인마로 전락시킨다.
<조커>가 전하는 죄성의 기원에 대한 메시지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심중한 과제를 던져준다.
타인에 대해 무자비한 비윤리적 죄성이 사회에, 삶의 현실에 과도하게 편재해 있으면, 신앙의 싹이 자라나기 어렵다. 인간을 쉽사리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삶의 정황 속에서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히 12:4)"는 권고가 허황된 구호로 취급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 사함을 가르치는 복음 전파의 사명 외에도, 죄성의 현실적인 싹을 어떻게 근절하고 예방할지 고민하며 행동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가 사회복지에 대해, 특히 고아와 과부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이유, 그리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린 현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이 철저히 식어버린 현실에서는 신앙이 자라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영화 <조커>의 배경은 고담(Gotham), 즉 소돔과 고모라('Go'morrah+So'dom')다. 사회에 만연한 죄성이 새로 태어나는 세대들을 무자비하게 삼켜버리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인 것이다.
교회가 사회의 소금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공간에서는 조커와 같은 피해자 겸 가해자가 끊임없이 복제되고 양산된다. 영화의 마지막 선동과 폭동 장면은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영화 <조커>의 기독교적 의미는 바로 죄성의 현실적-사회적 기원과 교회의 역할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이전 신앙의 세대와는 다르게 기초적 도덕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위태로운 현실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편향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커>는 죄악으로 가득한 현실에서조차 인간이 누리고 실천할 수 있는 힘, 즉 선을 향한 의지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감정이입 기법을 통해 아서 플렉의 타락의 필연성을 매우 그럴 듯하게 변호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 이해 관점으로 볼 때, 그는 여전히 선량한 광대 아서로 살 수 있었다.
영화는 이 가능성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림으로써, 인간 본성에 관한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