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9~42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요한복음 1장 29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은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예수님께서 나오심을 보시고 증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높으신 그 인격과 성품과 그 하신 모든 일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름으로 불리운 것이 사실입니다. 혹은 선한 목자, 생명의 떡, 세상의 빛, 포도나무, 말씀, 길, 진리, 생명, 부활, 왕, 선지자, 제사장 등 여럿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오신 세례 요한은 다른 어떤 이름보다도 예수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다른 이름으로 알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알아야 할 줄 압니다. 그런 까닭으로 세례 요한은 제일 먼저 예수를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증언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양'이란 이름은 우선 그의 성품을 연상하게 합니다. 모든 짐승 가운데 양은 순하고, 특별히 어린 양은 순진하고 무사(無邪)합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합니다. 주님의 성품이 그러합니다. 그의 흠 없고 점 없는, 수정같이 맑고 생수같이 깨끗한 성품을 연상케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어린 양은 온유와 겸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메시아의 성품을 묘사할 때에 메시아가 오시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겠다" 하셨는데, 이런 말씀도 연상이 됩니다.
사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며,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대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에 어린 양을 연상케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주님을 어린 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세례 요한이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여기에 말씀한 그 중심은 여기에 있지 않는 줄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의 중요한 사상은 주님에 성품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주님의 그 일생에 하신 일을 생각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레위 지파에 속합니다. 아론의 후손입니다.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통달한 선지자입니다.
이와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나타나 예수께서 보이는 그 순간 그에 대하여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외친 그 배후에는 과거의 모든 유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사 제도와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의 머리에, 배후에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옛날로부터 어린 양은 속죄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그 죄의 사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어린 양의 희생의 제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때부터 처음에는 성막에서, 다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린 양을 제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안식일을 당하면 그 수를 배로 늘려서 아침과 저녁에 두 마리씩 어린 양을 희생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으로 번제를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 가운데도 제일 큰 명절, 곧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유월절을 지킬 때에는 반드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이날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도 아마 아실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는 그날 밤, 온 애굽 땅에 맏아들과 처음 난 짐승들이 죽는 마지막 큰 재앙이 내렸습니다. 다만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정만은 그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넘어갔다고 해서 그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날 저녁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른 그 말의 배후에는 이와 같은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의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특별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양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삭과 같이 모리아 산을 올라갑니다. 그때에 이삭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올라가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가지고 같이 올라갑니다. 올라가다가 이 어린 이삭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린 이삭이 갑자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제사에 쓸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이 그런 질문 받았으면 뭐라고 대답할 겁니까? 아브라함도 당황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이런 말로 대답을 했습니다. "아들아, 그 어린 양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여기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사실 산상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한 수양을 준비하신 사실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만민을 위하여 한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는 말씀의 깊은 뜻대로 하나님께서 한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뜻은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아니고, 이방 사람들만도 아니고, 옛날에 있던 사람들만도 아니고, 오늘날 사는 사람들만도 아니고, 온 세상, 동서고금, 전세계 인류의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과거에 어떤 양은 한 사람의 죄를 위해서, 혹은 한 민족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물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전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어린 양입니다.
또한, 여기에 '지고 가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배후에도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에는 1년에 하루를 대속죄일로 정하고 지켰습니다. 이날에 특별히 대제사장이 염소 두 마리를 택하여 하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해서 하나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염소 위에 자기의 손을 얹고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그 염소는 멀리 사람 없는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지고 먼 곳으로 아주 사라졌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란 말 가운데는 이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셨을 뿐더러,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멀리 다른 곳에 가셔서, 말하자면 죄의 짐을 아주 없이하신 분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인류, 옛날 사람뿐 아니고, 지금 사는 우리뿐만도 아니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 온 세상, 전인류의 죄를 대속해서 속죄하시고, 그 죄를 아주 없이하여 주신 어린 양입니다.
우리가 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물론 이와 같은 깊은 진리는 인간의 얕은 이성으로 다 이해하기가 어렵고, 또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믿고, 또 이 진리 가운데서 살았고, 이 진리 가운데서 죽었습니다. 현재도 그렇고, 과거도 그러했습니다. 왜? 거기에는 믿을 만한 증거가 확실합니다.
우선 세례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인품이야말로 성실하고 강직한 인물입니다. 바른 말을 하다가 당시 헤롯 왕에게 생명을 잃은 용감한 선지자입니다. 이런 분이 거짓말 할 수 없습니다. 이분이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그뿐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또한 솔직히 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3장 1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만들어서 그 뱀을 보는 사람마다,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그때에 나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24절에는 자기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서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에서 한 알의 밀은 누구를 가리켰습니까? 물론 자기 자신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스스로 증언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모든 제자들에게 피차에 봉사를 배우라고 권면하시면서 마지막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예수님 자신이 증언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이 이렇게 믿고 또 증언합니다. 수제자라는 이름이 있는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8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이 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 증언합니다.
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도 요한이 증언합니다.
가장 위대한 신학자 사도 바울도 꼭 이와 같이 믿고, 이러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친히 기록하기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이라고 직접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 그 유명한 부활장에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도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11절 이하를 읽어 보세요.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에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라'고 하는 말은 주의 깊게 보라는 말입니다.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믿습니까? 이 진리를 믿는 이의 축복이 얼마나 큰가도 성경은 또한 분명하게 말하여 줍니다. 사도 요한이 신령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옆에는 어린 양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각 나라 백성 방언 가운데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몸에는 흰옷을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소리를 높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부릅니다.
사도 요한이 이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장로 가운데 하나가 대답합니다. "이들은 여러 족속 여러 방언에서 왔지만 모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어린 양의 손에 생명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우리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 그 책에 이름이 녹명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에는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노래입니다. 우리도 이 어린 양의 승리의 노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또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까? 또 그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예복이, 흰 예복이 준비되었습니까?
제가 일찍이 들으니, 어떤 신실한 잘 믿는 교우 한 분이 중병에 걸려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마침 그때 그 교회 교역자가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그 목사가 이사야 53장을 읽었다고 합니다. 읽어 내려가다가 4절 이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구절을 읽으니까 그 중하던 환자가 눈을 번쩍 뜨면서 "아, 목사님 그 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거기에 '우리'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있는데, '우리'라고 하는 말 대신에 '나'라고 하는 말을 넣어서 한 번 읽어 주시오. 그래서 그 목사가 그 절을 다시 이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 말씀을 다 듣고 그가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 내가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 모두가 이 어린 양 앞에 나아와 중심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영원한 축복을 받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아득한 눈을 열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는 그 보혈로 나의 죄를 깨끗게 하여 주셨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고난으로 나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신 이 은총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깨닫고,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성도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좀더 깨끗해지고 우리의 삶이 좀더 정결해질 수 있는, 어린 양을 따라갈 수 있는 크신 축복을 이 고난주간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