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예산과 계획을 세우고 저축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베푸는데 너그러운 이들이 있는 반면, 인색한 이들도 있다.
대부분은 이러한 결정에 따른 이유(해명)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러한 행동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적 재정에 관한 정확하고 총제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 더가스펠코얼리션(TGC)은 '돈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5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이다.
1. 하나님은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보다 마음에 더 관심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마음에 관심이 많으시다. '신앙과 일'이 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기 힘들다. 복음으로 변화된 마음은 돈에 대한 개념 뿐 아니라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와도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돈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돈에 관한 구절을 2,000개 이상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관한 많은 비유들을 말씀하셨고, 사도들 역시 돈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해선 안되며 하나님보다 돈을 선택해선 안된다. 우리는 너그러워야하고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부유가 아닌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 성경은 또 계획하고 저축하고, 가족들의 필요와 다른 이들의 필요를 돌아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2.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안다. 내가 줄 수만 있다면 그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베풂을 권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를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얼마를 베풀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루기 곤란한 점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십일조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인도함을 느끼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많이 낼 수도 있고 적게 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율법적이 되어선 안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은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마음과 비례한, 심지어 희생적인 헌금을 가르쳤는데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십일조를 넘어서는 것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들 중 5%만 수입의 1/10 (전통적 십일조)을 드린다고 말했다. 헌금을 내는 이들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2.5%를 냈다.
3. 채무는 피할 수 없으며, 좋은 신용을 유지하고 잘 갚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채무는 매우 일반적이다. 모든 형태의 채무가 늘고 있다. 어떤 채무는 매우 필요한 것이지만, 계획을 잘 세우고 훈련하면 피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성경은 빌리고 갚는 것을 정확하게 금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채무는 '노예'의 형태이며, 채권자는 채무자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 부분적인 소유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돈을 빌려야 하는 압도적인 필요가 있다 할찌라도, 우리는 스스로 채무의 노예가 되어선 안된다. 최소한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선 안되며, 가능한 한 빨리 이를 청산해야 한다.
4. 열심히 일하고 좋은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재정적인 축복을 주실 것이다.
역사적으로 재정의 축복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2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불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인이 잘 살고 부유하길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부유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돈이 대해 더 정확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 이들에게는 더 많이 주시고, 다른 이들에게는 적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는 우리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부유에 처할 때도 있고 가난에 처할 때도 있다.
5. 하나님께서는 날 돌보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돈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또 우리 상황에 대해 책임을 묻기도 하신다. 재정에 관해 우리가 해야할 부분을 하면 된다.
그의 약속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지혜로운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이용한 소극성과 무반응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