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과 인권: 낮은 형량의 이데올로기, 그 인본주의적 뿌리에 대해
기독교 세계관으로 대중문화를 조망하는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이번 편에서는 2년 뒤 출소한다는 조두순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영학 등 사법부의 잇따른 흉악범죄에 대한 관대한 판결의 배경을 드러냅니다. -편집자 주
◈공의 혹은 인권: 국민감정과 낮은 형량의 대립
최근 몇 년간 사법부는 극악한 흉악범죄나 청소년 범죄, 그리고 음주운전 과실치사 등에 대해 국민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 낮은 형량을 부여해 왔고, 이는 국민들의 사법불신을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형법이 범죄예방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는 인식, 사법기관들이 피해자의 인권은 무시한 채 가해자의 인권만 보호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지금, 낮은 형량에 대한 세간의 분노는 정점에 달해 있는 듯하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대중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왔다. 한국영화의 거장이라 칭송받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복수 시리즈,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는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세 편의 시리즈 가운데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는 공적 제재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사적 제재로 해소하는 서사를 전달한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그 후로도 잊혀질 만하면 개봉되곤 했는데, 대부분 개봉 시기가 공적 제재의 수위가 약하다는 분노섞인 여론이 형성되었을 때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 그 가운데서도 특히 <친절한 금자씨>는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과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이 알려진 이듬해 개봉한 작품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는 아동성폭행범 조두순 사건,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과 아동성폭행 및 살인범 김길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2008-2010년 개봉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 작품이다.
이 외에도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영화화한 <방황하는 칼날>(2014)의 서사 역시, 중학생인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청소년들을 일일이 찾아가 살해하는 아버지의 사적 제재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2014년에는 10대 청소년 범죄의 흉악성이 심각해짐에 따라, 사법부가 18세 미만 범죄자에 대해 최대 20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처벌기준을 강화한 바 있다.
이처럼 영화계를 위시한 대중문화계는 낮은 형량으로 인해 유발되는 국민적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허구적 서사 속에서나마 흉악범들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수여하는 것을 흥행의 한 방편으로 삼아 왔다.
최근에도 낮은 형량에 대한 불만과 사법불신의 정서를 고조시킬 만한 소식들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는 2017년 인천 초등생 살해 주범(미성년)에게 20년형이 선고되었고 피고인은 대법원 상고를 제기했다는 소식(2018년 4월), 그리고 '어금니 아빠'로 알려진 이영학의 여중생 살해 사건에 대한 항소심 감형 소식(2018년 8월)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안들에 대해 대중문화계는 다시 한 번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영화가 아닌 웹툰의 형식을 빌어 사적 제재에 의한 정의구현의 서사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있다.
김규삼 작가의 필치로 그려진 <비질란테>는 2018년 4월부터 네이버 포털에 연재되고 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흉악범에게 어머니를 잃은 뒤, 법이 제대로 제재하지 못하는 흉악범들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한 경찰대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애초 작품의 제목 자체가 사적 제재를 수행하는 '자경단(vigilante)'인 만큼, 서사의 전개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흉악범죄, 청소년 범죄, 음주사고 사례들이 거의 각색을 거치지 않은 실제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웹툰 <비질란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살해한 흉악범의 판결에 좌절한 후, 낮은 형량을 선고받은 흉악범들을 직접 처단하는 한 경찰대생의 이야기를 그린다. |
조두순 사건(2008년), 화순 서라아파트 모녀 살인 사건(1997년, 남녀 청소년 4인이 평소 알고 지내던 앞집 주부와 3살배기 딸을 살해하고 금품을 탈취한 사건), 아우디 음주 역주행 사건(2016년, 음주운전 역주행으로 24세 여성이 일가족을 교통사고로 사망시킨 사건, 본인은 연매출 몇십억 대의 식당을 운영하면서 합의금조차 내지 않음) 등이 거의 각색 없이 등장하며, 범인들은 주인공과 주인공을 모방한 자경단에 의해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다.
본 웹툰에 대한 반응은 90% 이상이 공감과 환영이다. 법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이들을 개인적으로 처단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이같은 현실은 우리 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공의와 인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데 대한 대중들의 실망감과 분노를 입증한다.
우리 형법은 왜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낮은 형량을 부여하는가? 이 물음은 수없이 반복되어온 것이고, 그에 대한 원론적인 대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법은 족보상 (유럽)대륙법 체계를 따른다. 대륙법 체계는 고정된 성문법을 따르고, 판사의 재량권이 비교적 약하며, 인간을 교화의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처벌보다는 교화에 무게중심을 두는 형사판결을 지향한다.
그나마 한국이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국가들 가운데 형량이 높은 편이며,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은 한국보다도 형량이 한참 낮은 대륙법 체계를 따른다.
일례로 2011년 7월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연쇄테러 사건(정부청사 폭탄테러 및 10-20대 학생들에 대한 총기난사로 불과 몇 시간만에 총 77명을 살해하고 범인 본인은 투항한 사건)의 범인인 극우주의자 브레이비크는 불과 21년형을 받는 데 그쳤다. 한국이었으면 거의 예외없이 사형이 구형되고 선고되었을 것이다.
▲선고공판 자리에서 나치식 경례를 한 노르웨이의 극우주의 테러범 브레이비크. 폭탄테러와 총기난사로 단 하룻만에 총 77명을 살해한 죄로 21년형을 선고받았다 |
어쨌든 대륙법은 낮은 형량을 지향하고, 한국 역시 그런 전통을 따른다. 그런데 여러 모로 볼 때 단지 "우리 법이 대륙법 체계를 따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인간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법철학적 인간 이해는 긍정적이고 이상적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피해자만 고통받을 뿐 아니라 때로 또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부조리를 낳는다. 그래서 최근 국내에서는 대다수 국민들이 영미법 체계와 같이 강력한 형량을 부여하는 판결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낙관과 비관: 대륙법의 이데올로기,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
낮은 형량으로 인간을 감화하고 교화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사형을 불사하는 강력한 처벌로 일벌백계하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숱하게 벌어져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만을 내놓는 논란이 아니라, 비교적 확고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이런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낙관적 인간 이해를 바탕삼는 대륙법의 근본 이데올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대륙법의 뿌리는 로마제국 시대 성문법과 그에 근거한 판결체계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의 성문법은 비록 사적 제재를 용인하지는 않더라도, 그 형벌 수행 방식에 있어 상당한 수준의 보복성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극히 잔혹한 방식의 사형을 집행했다. 다수의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런 잔혹한 방식의 사형에 희생됐다.
따라서 대륙법의 인간 이해와 인권사상은 로마시대를 기원으로 보기 어렵다. 기실 대륙법의 낙관적 인간 이해는 약간 멀리 본다면 15-16세기의 인본주의, 조금 가깝게 보면 17-19세기의 계몽주의다. 양자의 특징은 인간을 무한히 발전 가능한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이 발전은 지적인 발전과 도덕적 고양 양측을 모두 포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그가 아무리 악한 일을 자행한 흉악범이라도, 그의 이성과 의지를 사용해 지적 발전과 도덕적인 고양을 이룰 가능성을 무한하게 품고 있는 고결한 존재라는 믿음이, 인본주의와 계몽주의 양측 모두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를 당장 복수심에 따라 처단하기보다, 그가 가진 지성과 도덕의 힘을 현실화하여 교화하는 것이 특정 공동체나 사회 전체, 혹은 인류 전체를 위해 유익하다는 것이 낮은 형량으로 성격규정되는 대륙법의 기본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법은 낮은 형량을 부여하는 대륙법 체계를 따른다. |
이런 법철학적 사고는 19-20세기를 지나, 실존철학의 시대에 들어오며 보다 강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실존철학의 대표주자였던 하이데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사회나 인류의 작은 부속물이 아니라, 각기 그 사람의 세계를 구성하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것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각 사람의 존재는,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든 간에 나름의 의미가 있고 소중하며,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이라도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인본주의-계몽주의-실존철학으로 이어지는 이런 인간 존중의 사고는 오늘날 대륙법 체계의 낮은 형량을 결정짓는 사상적 근거로 작용해 왔다. 유럽, 특히 독일과 북유럽의 너그러운 난민포용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슬림 난민들이 숱한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그들을 사람 자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독일과 유럽 각국 시민들의 포용적 태도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런 생각은 대단히 이상적이고 숭고하지만,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계 역시 내포하고 있다.
반면 영미법 체계는 실증적 성격을 갖는다. 영국과 미국의 법적 전통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성문법을 미리 제정해 놓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경험적으로 이치와 감정에 적합한 판결을 내리고 이 판결들을 종합함으로써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법률 체계를 완성해 왔다.
따라서 영미법의 인간 이해는 대륙법의 그것에 비해 대단히 현실적이다. 영미법의 인간 이해는 인간이 누구든 수시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이런 범죄에 대한 욕구는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데서 도출되었다.
이에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해 버린 듯한 몇몇 심중한 죄악들(미성년자 성폭행, 납치, 살해, 학대, 그 외 성인들에 대한 강력범죄, 사기 등의 경제사범)에 대해서는 사형뿐 아니라 한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형량(500년형, 1,000년형 등)을 부여한다.
▲2002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세 명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납치한 뒤 11년 동안 감금하고 학대, 성폭행한 아리엘 카스트로. 그는 징역 1,000년형을 선고받은 후 감방에서 자살했다.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미국의 형법은 엄벌주의, 누적주의에 입각해 인간됨을 포기한 흉악범들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과중한 형량을 부여한다. |
한국은 근대화 시기에 돌입하자마자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독일의 대륙법 체계를 수용했고,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 역시 독일의 대륙법 체계를 수용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의 판사들은 원칙상 범죄자들이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교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형량을 부여하는 판례들을 따른다. 이에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국가들의 판결이 부여하는 형량에 비해 비교적 경미한 수준의 형량을 범죄자들에게 부여한다.
낮은 형량을 부여하는 대륙법적 인간이해가 올바른가? 아니면 높은 형량을 부여하는 영미법적 인간이해가 올바른가? 이 문제는 기독교 신학자, 기독교 윤리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논란이 되어온 문제다.
성서는 대개 죄악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과 그의 일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만, 때로는 도피성(수 20:1-9)이나 간음한 여인의 일례(요 8:1-11)와 같이 형벌을 감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물음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한국의 사법부가 흉악범들에게 부여하는 낮은 형량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그 방향성을 결정짓는다.
아울러 사적 제재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낮은 형량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는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들에 대한 판단의 방향성 역시 결정짓는다. <계속>
▲박욱주 박사.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