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이정순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중동연구원)의 논문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지위 변모 양상 요인 분석'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이 논문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의 '중동연구' 논총 제2호(2018)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는 이슬람의 심장이며 발생지이다. 사우디는 이슬람의 세 곳 성지중 두 곳(메카, 메디나)이 있는 지구상에 가장 복음화가 안 된 나라중의 하나이다. 사우디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나라의 여성은 이슬람 이념의 상징이 되어 전 세계 이슬람국가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세계 인구의 약 50%가 여성이듯이 현재 사우디 인구의 약 50%도 여성이다. 오늘날 사우디의 지형은 변한 것이 거의 없지만, 지금 그 땅에 사는 사우디 여성들의 삶은 느리더라도 변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사우디에서 여성의 지위 변화로 지금 사우디 사회는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사우디는 종교와 문화가 혼합되어 존재하는 사회이기에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사우디의 전통문화와 이슬람을 연관시키어 일반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종교와 문화적으로 우리와 매우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종교, 정치, 문화 등을 포함하는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글로벌 시대에 사우디와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편견과 오해의 시각을 가진 사우디의 일반화된 모습이 아니라, 사우디 내 여성의 실제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와 안목을 갖고 지혜롭게 그들에게 다가가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초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사회 지위
사우디 여성의 생활은 사우디에서 태동 된 이슬람 발생 이전과 발생 초기와 그 이후가 각각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우디에서는 여성의 거의 모든 생활에서 꾸란의 가르침과 샤리아(Sharia) 규칙을 적용하여 취급한다.
2.1. 이슬람 이전(자힐리야 Jahiliya)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의 지위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를 자힐리야 시대라고 부른다. 그 당시 아라비아반도의 사회는 다양한 부족이 많은 관습과 종교를 가졌으며 여성의 지위는 다양했다. 당시 여성들은 노예와 살림 도구가 아닌 대등한 관계의 반려자로 인정되었다. 이슬람 이전에 여성은 여성 성직자, 전사, 지도자, 전쟁터에서 간호사를 포함하여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 참여가 가능했다. 또 여성의 지위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슬람 하에서 여성의 지위보다 높았고 영향력이 매우 컸다.
또한, 당시 유행했던 여아 매장하는 풍습은 꾸란(17:31)에서도 지적하듯이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식량부족으로 인해 여아는 식량만 먹어 없애는 것으로 여기어 생매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으며, 이슬람 이후는 금지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 이전에 여성의 지위가 이슬람 이후보다 낮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 측의 과장된 표현이다.
2.2. 와하비즘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지위에 끼친 영향
(1) 초기 이슬람 여성
사우디는 이슬람의 역사적 발생지이다. 610년 무함마드가 최초의 계시를 받은 이후 창설된 이슬람은 이슬람의 깃발 아래 630년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을 통일한다. 이슬람 초기에는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관행이 얼마간 계속 영향을 주었다. 초기 이슬람의 결혼을 연구하는 게르트루드 스턴(Gertrude Sterm)은 메카나 메디나 어느 쪽도 이슬람 이전 시대에 일부다처를 실행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븐 사아드(Ibn Saad)의 전기 자료에 따르면, 일부다처제는 메카나 무함마드가 이주한 농업공동체인 메디나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직위가 더 높았기 때문에 일처다부제의 형태가 있었다. 그러다가 일처다부제가 이슬람의 영향으로 폐지되고, 그 뒤 여성들은 한 남자하고만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소수의 부자만이 일부다처를 유지했는데, 이는 신체적, 사회적, 정치적인 힘의 표시이며, 부와 권력을 가진 특정 계층자 이외에는 거의 드문 일이었다.
이슬람 초기 대표적인 여성의 모습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부인들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메카는 상업 도시였으며, 무함마드의 첫째 부인, 카디자는 과부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무함마드는 카디자의 재정을 통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었다. 그녀가 죽자, 무함마드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대부분 젊고 아름다웠다. 특히, 무함마드가 가장 총애한 셋째 부인 아이샤는 낙타를 타고 그와 함께 수많은 전투에 동행했다. 무함마드의 부인들에 대한 숫자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 12명 이상부터 22명까지의 부인들과 결혼하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무함마드의 많은 여성과 결혼은 무슬림 남성들에게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일부다처제와 어린 소녀와의 결혼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갖게 하였다.
(2)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와하비즘이 여성에게 끼친 영향
사우디는 이슬람 발상지이며, 와하비즘(Wahhabism)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8세기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Muhammad ibn Abdul Wahab 이하 와하브, 1703~1792)는 이슬람 사회가 타락하고 있으니 무함마드 시대로 되돌아가자며, 1745년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정치 운동을 창설하고 정교일치를 주장하였다. 무함마드 빈 알 사우드(1726~1765, 이하 알 사우드)는 부족장 중 하나였지만, 와하브와 제휴함으로써 1745년 제1 사우디왕국을 선언하였다. 그 후 사우디 왕가는 와하비즘의 이념에 의지하여 국가를 300년간 유지했다. 와하비즘은 석유로 인한 부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때까지 아랍 반도에서 확장되지 않았다.
오늘날 사우디는 아라비아반도의 약 80%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1901년 2월, 압둘 아지즈 빈 알 사우드(1875~1953 이하, 압둘 아지즈, 서양에서 이븐사우드)는 그의 나이 25세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건국 초기 국정 안정을 단기간에 이루기 위해 아라비아반도 부족장들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권을 확보하였는데, 52세까지 총 199번 결혼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의 짧은 결혼까지 추산하면 300명 이상 여성들과 결혼하였다. 사우디 건국 이전에는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은 오토만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압둘 아지즈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연합하여 오토만터키 군을 쫓아냈고, 1927년 5월 20일 영국과 제다조약을 맺어 독립을 인정받으면서, 1932년 9월 23일 사우디왕국을 창립하였다. 사우디는 근대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꾸란을 기본법으로 해서,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의 행동을 관장하는 이슬람 교리에 대한 가부장 제적 해석을 제도화했다.(계속)
이정순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중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