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사역을 하면서 경험하는 큰 은혜는 사역의 모든 보답이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하나님의 천사들로부터 직접 온다는 것이다. ‘갚을 수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때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 준 것’이라는 말씀처럼, 그 모든 보상을 ‘하나님께서 직접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새는 불경기라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일반인들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저희 같은 소외계층의 형편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신 것처럼, 저는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 분들을 찾기 위해 무작정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선교기금이 필요합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외면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천사들은 꼭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상점에 전화를 걸어 “저희가 선교기금이 필요합니다. 함께 동참해 주세요’하니까 ‘한번 오세요’하시더니, 찾아가니까 홍삼가게를 하시는 장로님께서 처음 보는 저를 보고 무작정 홍삼드링크 한 박스(100병)를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집사님은 말없이 헌금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분을 처음 만나고 그 분도 저를 처음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저 무작정 갔고 무작정 만났으나, 저희는 하나님안에서 한 자녀된 자이며 또한 이미 성령안에서 하나된 지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놀라운 축복과 돕는 천사를 우리 믿는 자 앞에 이미 준비해 놓으시고 채우시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결코 유별난 나와는 거리가 먼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주님안에서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지체인 것입니다. 장애인이 쓰러지면 사회가 쓰러지고 교회가 쓰러지고 우리 모두가 쓰러집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바로 우리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사회의 한 구성원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우리도 시각장애인인가?”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시각장애인’되었더면 죄가 없거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한 말씀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장애인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두루미와 너구리 비유가 나옵니다. 너구리가 두루미를 집에 초대해서 대접을 하는데, 따뜻한 스프를 접시에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입이 넓적한 너구리는 잘 먹는데 입이 뾰족한 두루미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구리 집에 놀러간 두루미는 졸지에 장애인 신세가 된 것입니다. 두루미도 초대에 감사(?)해서 너구리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고기를 길다란 유리병 안에 담아서 대접했습니다. 두루미는 입이 길고 뾰족하기에 긴 주둥이를 병속에 넣어 고기를 맛있게 먹었지만 입이 넓적한 너구리는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너구리가 일종의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사실 장애의 기준은 애매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수십억의 사람 중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고, 육지 동물들은 땅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독특한 달란트와 개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속에서 그렇게 빠른 돌고래가 육지에 올라오면 한 발짝도 못 옴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인 독수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빠르고 날센 독수리도 물속에서는 아무 힘도 못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의 독특한 능력과 달란트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하다는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존재가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장애인의 독특한 달란트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장애인은 이상한, 색다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 하에 다양하게, 창조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동질적이고 평균된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여, 이러한 기준에 이탈한 이질의 개성일수록 비가치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이들을 비가치화하고 은연중에 멸시와 편견의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못 이르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자이며 문제성있는 존재로 낙인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장애인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장애인의 90퍼센트가 후천성 장애인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장애인이 된 사람의 90퍼센트는 원래 태어날 때 장애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살다가 갑자기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꼭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장애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언젠가는 단 몇 분이라도 장애 상태를 경험해야 하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잠재적 장애인’입니다. ‘내 건강으로 내 맘대로 나를 위해 쓰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니까 남에게 도움 줄 일도 없고 또한 받을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돕지 말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위험에 처하도록 방치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멸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 갈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사실은 자신을 돕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나 일반인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돕는 귀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한번은 어느 상점에 전화를 걸어 “저희가 선교기금이 필요합니다. 함께 동참해 주세요’하니까 ‘한번 오세요’하시더니, 찾아가니까 홍삼가게를 하시는 장로님께서 처음 보는 저를 보고 무작정 홍삼드링크 한 박스(100병)를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집사님은 말없이 헌금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분을 처음 만나고 그 분도 저를 처음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저 무작정 갔고 무작정 만났으나, 저희는 하나님안에서 한 자녀된 자이며 또한 이미 성령안에서 하나된 지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놀라운 축복과 돕는 천사를 우리 믿는 자 앞에 이미 준비해 놓으시고 채우시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결코 유별난 나와는 거리가 먼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주님안에서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지체인 것입니다. 장애인이 쓰러지면 사회가 쓰러지고 교회가 쓰러지고 우리 모두가 쓰러집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바로 우리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사회의 한 구성원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우리도 시각장애인인가?”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시각장애인’되었더면 죄가 없거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한 말씀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장애인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두루미와 너구리 비유가 나옵니다. 너구리가 두루미를 집에 초대해서 대접을 하는데, 따뜻한 스프를 접시에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입이 넓적한 너구리는 잘 먹는데 입이 뾰족한 두루미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구리 집에 놀러간 두루미는 졸지에 장애인 신세가 된 것입니다. 두루미도 초대에 감사(?)해서 너구리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고기를 길다란 유리병 안에 담아서 대접했습니다. 두루미는 입이 길고 뾰족하기에 긴 주둥이를 병속에 넣어 고기를 맛있게 먹었지만 입이 넓적한 너구리는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너구리가 일종의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사실 장애의 기준은 애매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수십억의 사람 중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고, 육지 동물들은 땅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독특한 달란트와 개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속에서 그렇게 빠른 돌고래가 육지에 올라오면 한 발짝도 못 옴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인 독수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빠르고 날센 독수리도 물속에서는 아무 힘도 못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의 독특한 능력과 달란트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하다는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존재가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장애인의 독특한 달란트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장애인은 이상한, 색다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 하에 다양하게, 창조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동질적이고 평균된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여, 이러한 기준에 이탈한 이질의 개성일수록 비가치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이들을 비가치화하고 은연중에 멸시와 편견의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못 이르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자이며 문제성있는 존재로 낙인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장애인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장애인의 90퍼센트가 후천성 장애인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장애인이 된 사람의 90퍼센트는 원래 태어날 때 장애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살다가 갑자기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꼭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장애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언젠가는 단 몇 분이라도 장애 상태를 경험해야 하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잠재적 장애인’입니다. ‘내 건강으로 내 맘대로 나를 위해 쓰는데, 무슨 상관인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니까 남에게 도움 줄 일도 없고 또한 받을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돕지 말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위험에 처하도록 방치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멸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어 갈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사실은 자신을 돕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나 일반인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돕는 귀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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