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Photo : 기독일보) 기드온동족선교회 박상원 목사
기드온동족선교회 박상원 목사

1945년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비극의 분단 이후, 어느덧 80년이라는 야속한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허리가 잘린 분단국가로 남아 있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 기형적인 분단을 마치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포성보다는 안락한 평화가 익숙하고, 가보지 못한 통일의 길보다는 차라리 이대로 가로막힌 분단의 상태가 더 안전하고 현실적이라고 믿는 거꾸로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라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깊은 분단은 단지 국제정치가 낳은 비극적인 산물일 뿐인가?" 

세상의 역사가들은 분단을 명쾌한 국제정치학적 논리로 명명합니다. 미·소 강대국의 패권 대립, 냉전 체제의 희생양, 6·25 전쟁의 상흔, 그리고 남북의 극단적인 이념 갈등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모두 지워질 수 없는 뼈아픈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렌즈를 통해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인간이 기록한 사건의 표면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는 역사의 심연으로 한 걸음 더 깊이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표피적 질문만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감추어진 "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아픔을 허락하셨는가?"를 주님의 보좌 앞에서 울며 묻게 하십니다. 

구약의 역사를 가만히 파헤쳐 보면, 거룩한 도성 예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칼날에 무너지고 백성들이 바벨론의 차가운 포로 신세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결코 조국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거나 외교적 지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정세 분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가를 원망하거나 시대를 탓하기 전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민족의 곪아 터진 죄악의 실상을 직시했습니다. 특별히 바벨론 왕궁의 총리였던 다니엘은 자신이 직접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고 범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이 지은 배교의 죄를 온전히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거친 베옷을 입은 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단 9:5)

다니엘은 손가락을 들어 "저 조상들이, 저 타락한 정치가들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슴을 치며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핏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느헤미야의 가슴 역시 동일한 성령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조국의 예스라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페르시아 왕궁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통곡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돌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향한 민족의 영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음을 영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와 우리 성도들 역시, 저 서슬 퍼런 삼팔선을 바라보며 동일한 영적 통찰로 가슴을 찢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저 북녘의 독재 정권을 향해 분노의 삿대질을 했고, 공산주의의 잔혹함을 비판했으며, 끝없는 대북 국제 정세만을 분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꽃 같은 시선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영적 음란함과 부패함을 돌아보며 통곡한 적은 과연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 사조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슴을 짓누르는 배교의 아픈 상흔이 있습니다. 1938년 9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총회라는 거룩한 이름의 자리에서 신사참배를 단지 '국가의식'일 뿐이라며 타협하고 허용하는 영적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모든 교회가 그 불의한 결정에 무릎 꿇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차가운 감옥의 칼날과 순교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며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민족의 배교라는 영적 역사 앞에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겸손히 자복해야 합니다. 분단의 아픔을 세상의 논리로 탓하기 전에, 우리 민족의 영적 간음과 죄악의 무게를 먼저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회개는 결코 과거의 역사나 타인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값구호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한 거울 앞에 서서 삐뚤어진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고 조율하는 영적 엎드림입니다. 

그러므로 한반도 통일의 진정한 출발점은 정치가 아니라 거룩한 '회개'입니다. 회개가 거세된 인간적인 통일론은 언제나 사사건건 상대방의 무조건적인 변화와 굴복만을 요구하는 칼날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타인의 죄를 묻기 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무관심'을 발견하고 통곡합니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의 피눈물을 외면한 채 우리만의 안락함에 취해 살았던 부끄러운 무관심을 봅니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어온 탈북민들을 향해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기는커녕 차가운 시선과 편견의 장벽으로 가두었던 우리의 위선을 봅니다. 분단의 비극을 너무 오래 일상이라는 편안함으로 길들여온 우리의 영적 무감각증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됩니다. 

그 통회의 눈물이 터질 때 비로소 통일은 허공에 맴도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성도가 목숨을 걸고 감당해야 할 거룩한 '영적 사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세상은 통일을 철저히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로 계산하려 듭니다. 통일 비용의 천문학적 숫자를 두려워하고, 통일 이후에 찾아올 사회적 혼란과 내 몫의 감소를 걱정하며 주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조문인 성경은 물질의 계산기보다 언제나 '사람의 영혼'을 먼저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이념의 승리나 체제의 통합이 아니라 그 품에 안으실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복음적 통일은 어느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무력으로 집어삼키는 전쟁의 승리가 아닙니다. 복음적 통일의 정점은 수십 년간 총칼을 겨누며 원수로 살아왔던 남과 북의 영혼들이 십자가의 보혈 아래서 극적으로 화해하고, 마침내 서로를 얼싸안으며 진정한 형제요 자매로 거듭나는 눈물의 상봉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서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사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화해의 절대 법칙입니다. 

진정한 통일은 날카로운 이념과 체제의 승리가 아니라, 깨어진 형상들의 거룩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골이 깊은 상처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치유되고, 얼어붙은 신뢰가 녹아내리며,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과 북의 백성들이 비로소 서로를 향해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하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은 정치적 사건이기 전에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영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분단의 안일함에 길들여진 우리를 향해 준엄하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저 허리가 잘린 한반도의 분단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그저 무덤덤한 저녁 시간의 정치 뉴스로 소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핏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아픈 가슴으로 함께 울고 있습니까?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허물어진 조국의 현실을 마주했을 때 정세를 논하기 전에 거친 바닥에 주저앉아 먼저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로 민족의 죄를 씻어내는 회개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어쩌면 한반도의 가로막힌 장벽을 무너뜨릴 복음 통일의 위대한 서막 역시, 바로 그 눈물의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품고 거친 골방 바닥에서 민족의 아픔을 안고 먼저 울어버리는 그 자리, 그리고 가슴을 찢으며 "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고쳐 주옵소서!"라고 목놓아 부르짖는 바로 그 눈물의 자리 말입니다. 

통일은 인간의 지략이 아닌 거룩한 회개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인류의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가장 영광스러운 출발점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