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엔도 슈사쿠 | 공문혜 역 | 홍성사 | 308쪽 | 13,000원
침묵의 소리
엔도 슈사쿠 | 김승철 역 | 동연 | 248쪽 | 13,000원
1. 사일런스에 대한 흥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Silence)>가 곧 개봉할 모양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영화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수입·배급사는 굳이 영어명을 붙일 이유가 있었을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익히 알려진 상태인데, 한글 제목은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고였을까? 이미 니코츠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영화화한 감독이고, 그때의 논란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원작 자체가 쉽지 않은 작품이라 그러한 갈등은 예상됐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기에, 그에게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어떻게 재해석될지 사뭇 궁금하다. 특히 출연배우들도 예상했던 배역을 맡고 있어 더 흥미롭다. 리암 니슨이 페레이라 신부를 맡은 것은 당연해 보이고, 앤드류 가필드의 로드리고 신부 역할도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앤드류 가필드는 곧 개봉할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의 주연도 맡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안식교 신자로서, 무기를 거부하면서 전쟁에 뛰어든 실존 병사의 역할을 맡아 종교적 컬러가 강한 배우로서의 모습을 연이어 보여주게 됐다. 핵소고지도 여러 가지로 토론을 해볼 좋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사실 원작이 기독교 소설이나 소재라 해서 기독교적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틴 스콜세지도 기독교적 관점과 해석보다는 단지 그 흔적과 배경이 묻어나는 감독일 뿐이라,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사뭇 궁금하다.
때문인지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조용히 다시 주목받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도 중·고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었지만 읽지 못했는데, 결국 이번이 기회가 돼 읽는 늦바람에 동참했다.
2. <침묵> 대 <침묵의 소리>
이 책은 무겁다. 가톨릭에 대한 일본의 강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벌어진 실화를 소재로 극단적인 상황을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강력한 탄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를 새긴 '후미에'라 불리는 판을 밟아버리는 배교를 하지 않으면 잔혹한 형을 처하게 했던 상황에서 벌어진 이야기이다.
바닷물에 기둥을 세워 며칠간 묶어 놓거나 귀에 작은 구멍을 뚫고 더러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피를 흘리게 하는 등 극한 고문 속에서 죽어가는 것은 누구도 쉽게 이길 수 있지 못할 것이다. 그저 밟고 부인하면 된다는 유혹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을 듯 싶다. 게다가 신부에게 그가 밟지 않으면 다른 신자들을 그런 극형에 처하게 하겠다고 협박한다면,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이미 후미에를 밟고 배교했음에도 신부의 배교가 아니면 죽이고 말겠다는 협박 속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소설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선교를 했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문을 듣고 '죽음의 땅' 일본으로 찾아간 두 신부 이야기이다. 두 신부 중 한 명은 순교하지만, 한 명은 회유와 협박에 의해 배교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배교한 로드리고는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 그의 진심을 묻는다. 신도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 배교를 한 것 아니냐고 물으며, 페레이라 신부가 신앙을 지켰을 것을 간절히 바라며 묻는다.
그에 대해 페레이라는 일본의 왕성했던 부흥기를 예로 들며 일본이 왜 지금은 신도들을 찾기조차 힘들게 됐냐며, 일본의 다신교적 토대는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잠시의 발흥도 그저 많은 신들 중 하나로 여겼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그런 허무를 목도하며 배교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로드리고에게 이러한 고통의 현장 속에서 소설 속 한 신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을 내려 주십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내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별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없는 데 말입니다."
소설 속의 이러한 질문은 원작의 제목이 '침묵'인 것과 더불어 엔도 슈사쿠의 소설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여기게 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고난 속에 있는 성도를 방치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고 이 책을 읽은 이들은 이해하는 듯 싶다.
또는 소설에 대해 읽지 않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신도를 위해 후미에를 밟은 신부의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여겨져 온 것 같다. 종종 우리는 유명 소설이나 책을 읽지 않았거나 다른 책에서 인용된 부분만 부분적으로 읽어놓고서, 그 책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보다는 좀더 기독교적 시각에서 이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기치지로가 그 키(key)이다. 탄압을 피해, 또 배도한 죄책감으로 일본에서 도망나온 약하고 비열해 보이는 기치지로는 소설 내내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의 주변에서 맴돈다. 그러한 그를 로드리고는 경멸스럽게 바라보고 의심한다. 그리고 그의 의심은 틀리지 않는다. 실제로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또 다시 배교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보인다.
그런데 기치지로는 그러면서도 로드리고를 떠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는다. 몇 번씩 배신하고 넘어지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주변을 맴돈다. 일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신부를 밀고까지 했으면서도 자신은 신자라고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와서 잡혔다가 또 다시 배교한다. 그의 행동은 겉잡을 수 없다. 심지어 이미 배교하여 신부이기를 포기한 로드리고를 찾아와 고해성사까지 간청한다. 기치지로는 끊임없이 그 자신을 약한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변명한다.
오래 전 중·고등학교 때 조선일보의 귀퉁이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 칼럼>이 오랫동안 연재됐다. 거기서 목사님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회개와 회한'이라고 글을 쓰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둘 다 똑같다는 것이다(그 경중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끄러움 속에서도 주께 다시 나아왔고, 가룟 유다는 후회는 했으나 자기 목숨을 끊음으로 돌아갈 길을 스스로 차단했다.
엔도 슈사큐의 '침묵'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비쳐진다. 페레이라는 마치 그가 믿었던 신앙의 끈을 아주 내려놓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로드리고는 그래도 아직은 그가 신앙인으로서 살아있다는 몸부림을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기치지로가 더 그러하다.
소설 속에서 가장 비열하고 자격 없어 보이는 자이지만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믿음의 뿌리는 페레이라 신부의 표현처럼 끊어지거나 소멸된 것이 아니라, 그 불씨가 어떤 형태로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엔도 슈사쿠 자신도 이후에 쓴 <침묵의 소리>라는 책에서, 자신이 <침묵>을 쓰게 된 배경과 함께 몇 가지 작품을 싣고 있다. 그는 <침묵>을 언급하며 제목이 '침묵'보다 '침묵의 소리'란 의미가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이 소설은 하나님의 침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그러한 불씨를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비록 영웅이나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기치지로같이 연약하고 실패한 이들을 통해서라도, 일본의 복음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엔도 슈샤쿠는 <침묵>에 대한 오해를 <침묵의 소리>에서 풀기 원하는 듯 하다. 원작 <침묵> 에필로그로 포함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단지 부록처럼 여겨 읽지 않거나 소홀히 다룸으로써,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침묵'으로 해석하는 오해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국내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번역조차 안 돼 있는 듯 싶다. 필자가 읽은 번역본에서도 이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책과 더불어 읽은 <침묵의 소리>에는 이 부분이 역자의 주해와 더불어 실려 있는데,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인물인 쥬제페 키아라와 기치지로의 배교 후 삶이 그려진다.
그들은 배교 후에도 일본에서 은밀하게 포교활동을 했던 것 같고, 특히 기치지로는 보다 강건해진 신앙인의 모습마저 보인다. 배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삶은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만한 이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넘어지고 실패해도 일어나야 한다. 최근 목회자 몇 분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당당하게 다시 사역을 재개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합리화하자는 게 아니다. 기치지로나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의 실패와 못남을 안다. 그러기에 기치지로는 자신의 죄악을 끊임없이 고해성사로 나아가려 했고, 자신의 약함과 못남을 알기에 예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비열하고 굴욕적으로 보이면서도 매달리고 매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서 '나는 용서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뻔뻔한 것이며, 아직도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죄를 깨달은 자는 엎어지고 엎드러진다.
3. 늪지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의 토양을 늪지대라고 이야기하며 기독교가 생존할 수 없는 문화라고 강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생존 불가할 것 같은 토양과 문화였지만, 기치지로를 통해 비열하고 굴욕적으로 비쳐지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나는 신앙인들과 그 흐름을 작가는 보여준다.
특히 <침묵의 소리>에 실린 단편들에서 일본 문화와 종교적 배경에서 변형된 가톨릭 신앙의 '가쿠레'를 보여준다. 배교하고 숨어 지내던 이들이 자신들의 민속신앙과 결부돼 나타난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모습들을 보여준다. 전통적 가톨릭 신앙에서 이들은 그저 경멸의 대상이고, 하루빨리 회개해야 할 이들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이들을 좀더 따뜻한 눈길로 바라본다.
이러한 변형된 가톨릭 신앙은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서 중국의 오지 선교사 사역지에서도 그려졌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신라 때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신앙이 옳다고 이야기하거나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립되고 억압의 상황에서 체계화된 신앙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거나, 왜 올바른 교리를 지키지 못했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비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다. 마치 최악의 환경오염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마냥, 살아남은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마리아 관음상을 보는 눈도 그런 듯 싶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신앙과 교리를 합리화거나 이단을 두둔하자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건강하고 좋은 음식이 많음에도 불량식품만 먹는 아이가 있다면 혼날 만 하다. 그러나 유기농 식품과 좋은 재료가 있음을 알지만 살 수 없는 가정 형편의 아이가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세 끼 중 한 끼를 겨우 때우는 것을, 돕지도 않으면서 야단치는 것은 악하고 미련한 행위일 것이다.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붙잡고 열심을 내는 이들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물론 씻어야 할 때가 주어졌음에도 씻지 않는 것 역시 미련한 일이지만 말이다.
문양호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