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찾아보면,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용서에 대해 베드로가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이 말씀에서 강조하신 것은, 형제가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계속해서 용서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우리의 사고로는 도저히 주님의 방식의 용서란, 매우 힘들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강조하십니다.
'용서'라는 그리스어를 문자 그대로 풀어 보면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라고 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는 길이자 서로 상생하는 길입니다. 용서만이 복수와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 함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죄 없이 무수한 고난을 당하시고, 쓰디쓴 잔을 마시며, 처참한 십자가 형틀에서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용서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되기를 기도하시며, 사랑하신 분이 십니다,
지금 나라에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마비되다시피 온통 시끄럽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속해서 터지지만,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탐욕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특히 이 와중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애국의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되레 그들과 합심하여 시국선언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정치하는 종교인들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잘못은 분명 시인하며 사과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사과보다, 진심 어린 사과만이 용서의 가치가 나타납니다. 용서를 그저 건성으로 구하는 경우는 오히려 더 화를 자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 나라의 통수권자가 자신을 낮추고 사과했으면, 그 사과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몰라도, 일반 사회에서 구하는 사과는 형식적 아니면 건성으로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면 건성이든 형식이든 받아들이고,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 모두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미운 사람이라 해서, 무조건 사과를 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서를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용서와 분리되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와 이익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가득한 분리와 장벽 그리고 부당한 지배구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과 사랑이 담긴 용서가 적극적으로 감동하는 사회, 세상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와서 보라' 용서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복음과 함께 크게 담대히 외쳐야 합니다.
그저 책 속에서 말하는 지식의 사랑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용서할 수 있는 감동이 자리해야 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삶만이 주님의 자녀라 믿습니다.
용서에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무조건 적으로 하는 것임을, 주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 본받아 실천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정신은 곧 복음의 길이며, 교회는 죄에서 눌린 자들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주님 말씀에는 곧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며, 모두에게 용서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고 계심이 잘 나타납니다. 망설이지 말고 속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진심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