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복음 선교를 위해 왔다. 그러나 복음 선교는 단순히 예수만 전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 본 바 같이 의료, 교육 등 사회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진행됐다. 그 중,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왜곡된 전통이 복음과 상충되면서 서서히 그 문화가 개혁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는 애국 애족 활동과도 직결되는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이번 회부터 몇 차에 걸쳐 초기 교회의 이 부분 활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제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고 아시아를 제패하려는 허황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외 정책 수행을 위해 소위 ‘삼인(三刃)’이라는 음모를 획책했다. 하나는 러시아 황태자를 암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전권대신을 처치하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조선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이 민 왕후라 판단하고, 왕후 제거를 구체화했다. 일제는 마침내 민 왕후를 침전에서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는데 이 사건이 을미(乙未)년에 저질러진 것이어서 ‘을미사변’이라 한다.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는 궁중에서 자주 만난 왕후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녀의 눈에 비친 왕비의 모습을 옮겨 보기로 하자. “[왕비는] 약간 창백하고 마른 편이었으며, 날카롭고 빛나며 꿰뚫어 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나의] 첫눈에 그녀가 무척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안면에 지적이고 강한 특징이 있는 것을 누구든지 쉽게 깨닫게 된다. 그녀가 대화를 시작하면, 생동적이고, 순수하고 해학(諧謔)에 넘치며, 안면에는 밝은 빛이 가득하여, 단순히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훨씬 뛰어넘는 매력에 매료된다. … 아세아 대부분의 귀족 여인들이 지닌 지식은 중국의 고전에서 배운 것이 고작이지만, 왕비는 폭넓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행하며, 애국적이고 헌신적이어서 자기 나라에 가장 이익이 되는 것과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였다.”
이 글에서 민 왕후는 범상한 여인이 아니고, 한 시대를 뒤흔들 만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군대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 장교를 초빙해 2개 대대 군인을 교련시켰다. 이것을 훈련대라 불렀으며 모두 8백 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로 하여금 궁성을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궁성에는 일인들과 친일분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일제의 이등박문(伊藤博文) 내각은 간교한 육군 중장 삼포오루(三浦梧樓)를 주한 일본 영사로 파송하여 왕비 시해의 임무를 주었고, 강본유지조(岡本柳之助)를 행동 책에 임명했다. 1895년 10월 8일 드디어 영사 명령에 의해 일본 군인들과 낭인(浪人)들로 구성된 암살단들이 평민 복으로 갈아입고 범궁 했다. 환도와 호신용 총을 소지하고 고문관, 순사 등 60여 명이 왕비 제거의 뜻을 품고 있던 대원군의 사주를 받고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W.M.Dye, 茶伊) 장군 휘하 궁정 수비대를 몰아내고 야수처럼 궁 안으로 쳐들어왔다. 한 일본인은 고종이 거처하는 침전에까지 들이닥쳐 왕의 신변을 향하여 육혈포를 발사하고 어전에서 궁녀를 구타하고 이리저리 끌어당기면서 위협하기도 했다. 이 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稷)이 그 방 안에 있다 부상을 입고 포복하여 추녀 끝으로 나갔으나 일본인들이 쫓아가서 어전에서 찔러 살해했다. 왕세자는 또한 다른 곳에서 붙잡혀 끌려갔는데 관과 신발이 벗겨져 망가졌다. 칼을 들이대고 왕후의 처소를 물었으나 다행히 상처를 입지는 않고 급히 고종의 처소로 달려가 몸을 피했다. 폭도들은 세자빈의 머리채를 잡아채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왕비의 위치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자 죽어 있는 군인들 시체 곁에 내팽개쳐 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자객들은 왕후가 머무르고 있던 건청궁(乾淸宮)의 각 방을 찾아 헤매다 조금 깊숙한 침전에 있던 왕후를 찾아냈다. 왕후를 끌어내 칼로 몇 번을 내리쳐 현장에서 시해했고 다른 궁녀 셋도 함께 찔러 죽였다. 그들은 방 안에 있던 보물을 약탈하고 궁녀들을 끌어내어 왕후 진부를 확인했다. 그런 후 아직 절명하지 않은 왕후를 홑이불로 둘둘 말아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녹원(鹿苑) 수림(樹林) 속으로 옮겼다. 몸에 석유를 붓고, 장작더미를 에워쌓은 다음 불을 질렀다. 그들은 타오르는 불꽃에 석유를 계속 부으며 태웠다. 후에 그 곳에 가 보니 몇 조각의 뼈만 남아 있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이렇게 처참하게 시해하고 유린한 만행은 일찍이 인류 역사에 다시없었던 야만적 작태로 한 외국인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믄 극악무도한 참변”이라고 술회 했다.
이 때 모든 광경을 목도한 외국인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전기 기술자 사바틴(Sabbatin)이다. 이 사건은 이들 목격자들에 의해 외부에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이런 사실이 일제의 흉계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이 미국 공사관 등 재한 외국 공사관에 알려지면서 세계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제는 어쩔 수 없이 삼포 공사 이하 이 일에 가담했던 47인을 구속했다. 이들을 광도(廣島)에 압송, 투옥하고 모살(謀殺) 및 흉도취집(凶徒聚集)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일제의 하수인에 불과 했던 법원은 그들에게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면소(免訴)판결을 내려 석방하고 말았으니 저들의 죄가 또다시 하늘에 다았다. 삼포와 그의 일당은 감옥에서 풀려났고, 삼포는 민중들의 영웅이 됐다. 그들 일당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화되었음을 당연히 여겼다. 돌이켜 보면 세계 제2차 대전 말에 광도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온 도시가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고, 수 십 만 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일은 정의를 외면한 곳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렸다고 보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