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천 명이 넘는 성경인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누구일까? 단연 ‘예수’일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한 ‘인물’만은 아니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누구일까? 모세일까, 바울일까, 아니면 다윗, 삼손, 마리아일까. 그보다는 아브라함 아닐까. 예수쟁이들은 물론이지만 신자 아닌 이들도 아브라함을 잘 안다. 링컨 미국 대통령 까닭도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과거보다는 장래에 더 유명한 인물이 될 것 같다. 이 세상이 지구 국가 시대로 무섭게 달려가고 있는 때라서 더욱 그렇다. 아브라함은 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대인들의 대표 조상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희랍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한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도 위대한 인물로 모신다. 이슬람의 주도세력인 아랍인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 후손들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얼추 77억 인구 가운데 30억 정도의 존경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 종교 사이의 죽고 죽이는 적개심을 치료하려면 단연 아브라함 공동조상론이 특효약 아닐까. “같은 아브라함 자손들 끼리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야단들인가.” 그런 자각이 어서 속히 일어나야 한다.
실상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속 좁으신 분으로 행동하셨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언약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이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열매를 볼 수 없었다. 땅을 주신다는 언약도 사오십년이나 지나 겨우 손바닥만 한 가족묘지 ‘막벨라 굴’을 소유하게 하셨다. 하늘의 별과 같이 자녀를 많이 주신다더니 그것도 새까맣게 잊으신 것 같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아브라함이 머슴 엘리에셀, 조카 롯, 첩의 소생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 했겠나. 그러더니 겨우 100세가 되어서야 이삭 하나를 주셨다. 그런데 이삭이 씩씩한 청년이 되자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이 많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허풍공약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아브라함을 고향 갈대아 우르 곧 단단히 잡혀진 생활기반을 떠나게 하셨다. 복의 근원은커녕 환난의 근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멀고 험한 여행길로 몰아넣으셨다. 도보 여행이었을까, 낙타여행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아브라함을 통 큰 사람으로 육성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원대하면서도 세심한 시나리오였다. 사람이 여행을 많이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통 큰 지도자가 되려면 인내심이 필수 요건이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뒤에야 그 속뜻이 밝혀졌다. 하나님도 외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통 큰 계획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공중의 티끌과 같이 많아진다’는 하나님의 공약이 마침내 가시권에 들어왔다. 아브라함에게 무한대한 하늘,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보여주신 언약이 실천되었다.
성경은 믿음의 책이다. 그런데 그 첫 단추가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창15:6).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름도 ‘아브람’(고귀한 조상)을 ‘아브라함’(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개명하셨다. 한국말로는 하나님의 ‘하’자가 더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주신 선교대명·교육대명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의 근거가 되는 언약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이 그 족보의 마감이었다. 따라서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통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