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는 콘스탄틴(Constantinus, 272-337년) 황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대제(Constantinus Magna)라는 칭호를 붙여 그를 칭송한다. 적그리스도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05년)의 후임인 그는, 대권을 물려받아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폰테 밀비오(Ponte Milvio) 해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막센티우스를 기적적으로 물리친 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고로 기독교인들은 이제 음습한 카타콤베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가정사를 보면, 아버지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 황제(공동 황제)의 근위대장으로 있다가 그의 양아들로 입적되어(293년 3월 1일) 부제로 올라갔다. 한 마디로 군인으로서 출세한 사람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아내 헬레나는 본래 귀족이 아닌,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하급 병사였을 때 자신의 신분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지위가 높아져 부제가 된 상황에서, 그것은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신파극 같은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즉, 공부 잘하는 가난한 청년이 산에 들어가 고시 공부를 하던 중에, 외로움 때문에 시골 아가씨와 사귀게 되었다. 아가씨는 고시 공부를 하는 애인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 주어, 결국 그 청년은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그때부터 시골 아가씨에게는 역풍이 불어닥치게 된다. 스펙이라는 것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스펙은 무시할 수 없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역시 콘스탄티누스는 조강지처 헬레나와 이혼(292년)하고, 황제 막시미누스의 딸 데오도라와 결혼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콘스탄틴은 부하들의 강권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후에 추인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처신, 즉 어머니 헬레나와의 이혼한 것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콘스탄틴은, 실권을 잡게 되자 계모 테오도라가 낳은 이복동생들을 대부분 처형해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콘스탄틴 역시 아내와 이혼하고 가문 좋은 파우스타와 결혼(307년)했다. 파우스타는 황제 막시미누스의 딸이요, 후에 콘스탄틴과 싸워 패하는 막센티우스의 친동생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에게는 첫째 부인 미네르바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뛰어난 아들 크리스푸스가 있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정적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고 아버지가 황제에 오르도록 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이 믿음직한 큰아들을 부제(Caesar)로 삼아 일찍부터 후계자로 키웠다. 그리고 갈리아 사령관으로 보내 더 큰 지도자 경험을 쌓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의붓어머니 파우스타와 장자 크리스푸스와의 불륜에 대한 것이었다. 가당치 않은 일이겠으나, 당시 정략적인 결혼으로 아내는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개연성은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아내 파우스타와 관계가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육남매나 두었고, 콘스탄틴이 친정 식구들(막센티우스)과 불화할 때, 언제나 아내는 남편 쪽에 섰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당치 않은 불륜의 소문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콘스탄틴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던지, 전선에 나가 있던 아들에게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독약을 마시게 했다. 시어머니인 헬레나는 며느리 파우스타가 욕조에 들어갔을 때 물 온도를 높여 질식사시켰다. 콘스탄틴은 분노심 때문에 한 달 사이에 자신에게 중요한 두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요즘 같으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검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불륜의 소문에 대해 후대 역사가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즉, 콘스탄틴의 총애를 입고 자식을 육남매나 둔, 실질적 파워가 있는 아내 파우스타가 자신의 열 살 된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전처의 아들을 후계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할 목적으로 말이다. 마치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그에게 누명을 덮어 씌웠던 것처럼. 그 후 시어머니인 헬레나가 자초지종을 밝혀내게 되었고, 누명을 씌워 손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며느리 파우스타를 죽였다고 한다. 이 설이 많은 역사가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가려진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이런 일로 사랑하는 아내와 믿음직한 아들을 한꺼번에 죽음에 이르게 한 콘스탄틴 대제가 냉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로웠을까 싶다. 더구나 자신이 질투 때문에 죽인 아들에게는 이미 귀여운 자식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손자 사랑은 할아버지라고 한다. 그 귀여운 손자가 방실방실 웃으며 할아버지를 찾을 때, 얼마나 큰 후회가 그를 힘들게 했을까? 영조가 장자 사도세자를 죽이고, 후에 냉정을 되찾게 되었을 때 후회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콘스탄틴은 질투로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키게 만든 수도 로마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를 떠나 수도를 저 먼 콘스탄티노플로 훌쩍 옮겨 버렸고, 다시는 로마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은 짧은 생을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여정을 걸어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후회 때문인지 세례받는 일을 계속 미루다가 죽기 전(337년)에야 겨우 받았다.
한 가지 첨가할 부분은, 파우스타는 콘스탄틴과 결혼한 후에 자신의 살던 저택, 라테란 성당 부지를 당시의 감독 실베스토로 1세에게 헌납했다(324년). 그가 살던 정원의 일부분이 지금도 라테란 성당 한편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리고 324년에 콘스탄틴은 이곳에서 제1차 세계 기독교 공의회를 개최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치열하게 일어난 도나투스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일로 종교회의를 계속 주재하는 황제가 되었다. 이런 일도 속죄를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까? 우리는 지극히 단편적인 안목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질투심을 행동으로 옮김으로, 평생을 회한 속에서 살기도 한다.
어느 선배가 한 말이 귓전에 맴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이 세상에는 사랑하지 못함으로 얼마나 많은 비극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사람을 믿는 대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기도해야지 싶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의 여정을 위해서 말이다.
파우스타가 헌납한 땅 위에 세워진 라테란 성당이 앞을 가로막으며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잘 살라고 말이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