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 파문. 800억 원대의 횡령 혐의가 나오자 그는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자살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이 뇌물을 줬다는 정치인들의 이름을 메모로 남겼다. 그 리스트에 국무총리가 걸려들었고, 총리직을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치달았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프게 하는 게 있다. 성완종 회장이 어느 교회의 장로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남긴 성완종 리스트에 장로들의 이름이 다수 올라와 있다는 사실. (리스트가 사실이라면) 이들에게서 깨끗하지 못한 돈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살이라는 선택. 신분과 삶의 선택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게다가 평소 멘토로 두었던 어느 스님과 더불어 역술원을 찾아가 사주를 보았다는 뒷이야기까지. 씁쓸하지만 이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내가 도대체 누군가?'

어느 날 한 '바보'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어느 회사를 찾아갔다.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한 달에 얼마 주실 건가요?" "자네 값어치만큼 주지!" 그러자 바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안 되겠어요. 그렇게 적게 받아 가지고서야 누가 일을 하겠어요?"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이 없으니 누가 나를 아름답고 쓸모 있게 볼 것인가?

누구나 자신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 밝은 그림으로 그려진 자아상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게 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일치되는 행동을 한다. 지금 점검해 보자. 나의 선택은 어떤가? 나의 삶은 어떤지? 나의 신분과 이미지에 어울리는 삶인가?

우리가 자신의 자아상을 그려갈 때, 주변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칭찬을 받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은 자신을 밝고 환한 자아상을 그린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에게 혼나고 책망받기 일쑤였다면 자신을 어둡고 우중충하게 그린다.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들이 해 주는 칭찬과 격려의 말 한 마디가 당당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과 비난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다면, 자신을 아무런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해 주는 것은 매우 소중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온 사람은 자신을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매사에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낙인찍는다. 맥스웰 몰츠는 <성공의 법칙>에서 자아상을 수술하라고 권장한다. "자아 이미지는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과 행동, 심지어는 환경을 형성하는 전제이자 기초이며 우리 삶의 밑바탕이 된다.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자아 이미지를 증명하고, 그것을 강화시켜 주며, 악순환이 계속되거나 혹은 좋은 일만 계속 생기게 하는 것이다." 주변 환경과 사람들로 인해 자신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구겨지지 않도록 스스로의 평가를 주의해야 한다.

<새로운 미래를 소유한 새로운 얼굴>, 맥스웰 몰츠가 쓴 책이다. 그는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이다. 이미 제목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얼굴은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얼굴을 고침으로 새로운 생애로의 문이 열렸다'고 강조한다. 얼굴이 달라지니까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인생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불평하고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최근에 또 다른 연구 자료를 발표했다. "마음 속에 있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은 외모를 아무리 바꾸어도 안 된다."

사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외형적인 얼굴이고, 하나는 내적인 얼굴이다. 내적인 얼굴은 자아상이다. 내적인 자아상이 바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한다. 마음속에 있는 자아상을 성형수술하지 않고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 속에 있는 얼굴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 바로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영적으로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평가, 자신이 경험한 일에 근거해서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이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도 잘못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자아상을 그려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하나님이 그린 나의 모습은 어떤지, 거기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어떤 때라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그려주시는 그림을 갖고 살아야 한다.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게 불행의 원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행복할 수는 없다.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사는 게 가장 안전하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내가 타락한 죄인이라고 고발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게서 독립을 선언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게 문제이다.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 '그건 불공평하다'고 억지를 부려도 하는 수 없다. 대표성의 원리 속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대단한 존재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으스대도 별 볼 일 없는 존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인인 체해도 별 수 없다. 나는 불의한 자이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죄인에 대한 눈을 뜨면 은혜의 강물이 보인다(고전 15:10).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선언한다(롬 3:24).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이다. 의롭게 되는 데 아무런 대가를 지불한 것이 없다.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고, 인생의 새 출발이 이루어진다(고후 5:17).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이제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롬 8:17). 그래서 하늘 아버지를 닮아가려는 열망을 갖고 산다(엡 5:1). 지금은 형편없는 모습일지라도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때가 다가온다(요일 3:2-3).

그 소망을 갖고 있기에 부족하지만, 오늘도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인생이 아닌가? 자신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