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구분은 인간의 심령 속 그리스도의 내재 유무이다. 그리스도 권세로 죽음을 이기심으로 주어진 은혜의 영생은, 믿는 자의 심령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되어 있어야 가능한 천국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라도 외형적 믿음의 모습으로 천국 입성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내재된 사람, 즉 천국 입성을 보장받은 사람들의 물질관을 유추해 봄으로, 믿는 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볼 수 있는 표준률로 유추할 뿐이다.
이러한 추론들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된 인간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 해답은 성경 안에 있다. 성경에는 물질에 대한 표현을 하나님과 동격인 대문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물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해 경계해야 할 특별 대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믿음의 장애물 구실을 하며 많은 인간들을 죽음의 볼모로 끌어넣는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된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초월심이 생성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실천 신앙인으로의 변모를 수용하게 되며, 물질로 인한 기초적 성화와의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비틀림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목회를 하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담을 많이 하게 된다. "목사님, 저는 모든 것을 다 행하고 헌신할 수 있는데, 십일조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대답 대신 반문을 던진다. "헌신하신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물질을 도적질하면서 입성할 수 있는 천국이라면, 지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곳이리라.
평신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서 목사의 직분을 갖고 지난 세월이, 자기 자신과 자식의 안위를 위한 물질 축적과 권위를 위한 인생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목회자들의 타락이 만연한 시대이다.
아무리 설교를 잘 하고, 예배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영접하고, 넉넉한 웃음치레를 하고 동분서주 다녀도, 하나님 물질을 제멋대로 남용한 목회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을까. 물질 축적은 곧 우상숭배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성도들의 가장 큰 변화는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가치 기준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영혼과 육체의 생명은 물론,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십일조를 기쁨으로 드리는 것은 믿음의 본분이요 지극히 당연한 신앙의 기본적 도덕률이다.
똥기저귀조차 갖지 않고 태어나는 벌거숭이 신생아를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인생의 첫 모습을 쉽게 돌아볼 수 있다. 또 지하 영안실 냉동 창고를 거쳐 화장장 고온의 레일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 보더라도, 물질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인생임을 쉽게 돌이켜 볼 수 있다.
인생의 끝에 남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에게 그리스도의 영혼이 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 뿐이다. 내 생각, 내 기준으로 판단되는 천국 확신은 지극히 개인적인 긍정적 사고의 단면일 뿐이고, 마음의 위안으로 삼을 구실에 불과하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만 특별히 열린 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된 인간은 세상 시간에 국한된 물질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된 인간은 영원한 시간을 위한 물질관으로 헌신하게 된다. 물질 헌신은 곧 그리스도가 내재되었다는 영생의 징표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나 그 중에서 십의 구조는 너희에게 쓰도록 허락하는 바이니 십의 일조를 기쁨으로 남기라고.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헌금을 개인적인 부의 축적과 세상적인 타락, 유산 상속을 위한 헛짓에 몰두한 세월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에 사로잡힌 무리들아, 어찌할꼬!
땔감이 모자랄 지경의 지옥불 행렬에 목사들이 줄줄이 서 있다는, 천국을 다녀왔더니 목사들이 별로 없더라는 세상 조롱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천국은 그래서 좁은 문이라던가. 매우 좁은 문이라던가. 진실로 진실로 좁은 문이라던가.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