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백 만년 전, 지구의 두 거대한 구조판인 아라비아 구조판과 시나이 구조판의 지각 움직임을 통하여 요단 대협곡(Great Rift Valley)이 형성되었다. 두 구조판은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움직여 요단 대협곡이 생성된 것이다. 요단 대협곡에는 북쪽으로부터 훌라 분지, 갈릴리 호수, 요단강, 그리고 사해가 포함되어 있다. 사해 인근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이다. 현재 사해의 물은 급속히 줄어들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태이다. 사해로 유입되는 물의 양은 감소한 반면, 증발양은 많아 사해는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 사해를 보존하기 위한 이스라엘 정부와 요르단 그리고 국제 기구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약 7만년 전에서 14만년 전인 홍적세(Pleistocene epoch) 기간에 요단 대협곡에는 거대한 리산 호수가 생겨났다. 리산 호수는 갈릴리에서 요단강과 사해를 모두 포함하는 크고도 긴 호수였다. 당시 리산 호수의 수면은 지금보다 약 250미터 더 높았다. 1만 4천 년에서 1만 2천년 전에 북미와 유럽의 거대한 얼음이 줄고 빙하가 녹으므로 기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기후의 변화로 리산 호수의 강수량은 크게 줄었고 물은 증발되었다. 그러나 약 1만년 전에 강수량은 다시 증가했으며 리산 호수의 수면도 상승했다. 이때에 사해가 형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리산 반도와 사해가 형성되기 수 백만 년 전, 사해가 있는 요단 대협곡은 아라비아 구조판(Arabian Plate)와 아프리카 구조판(African Plate)이 서로 떨어지므로 홍해가 생겼고 이 두 거대한 구조판의 반대 움직임으로 훌라 분지, 갈릴리 호수, 사해가 생긴 것이다. 시나이 구조판과 아라비아 구조판은 아직도 활동 중이다. 아라비아 구조판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시나이 구조판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이 두 거대한 지각의 움직임으로 요단 협곡에서 특히 사해 지역은 더 낮아지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런 지각 운동으로 요단 협곡의 동서 양쪽에 위치한 산들은 더 높아지고 헐몬산도 조금씩 상승한다.
두 지각의 단층 운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지진을 일으켰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주전 31년에 발생한 지진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당시 지진의 흔적은 쿰란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해는 지구 표면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로 사해의 수면은 2009년 조사에 의하면, 해수면 이하 422미터보다 더 낮다. 사해의 수면이 점점 더 낮아지는 이유는 사해의 양쪽에 위치한 모압 산지와 유다 산지의 상승 그리고 기후의 온난화 현상 때문이다. 현재 사해로 유입되는 강수량은 과거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주변의 강수량은 연간 100mm 이하이며 이곳의 여름 온도는 평균 104도 (섭씨 40도)에 이른다. 사해 인근의 여름 표면 온도는 이보다 훨씬 높다.
비는 몇 개의 골짜기를 통해 사해로 유입되지만 물이 사해에서 빠져 나가는 출구는 없다. 그래서 사해의 수면은 유입되는 물의 양에 따라 상승하기도, 줄어들기도 한다. 주변에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면 사해의 수면은 상승했고 가뭄이 들어 유입되는 물이 적으면 사해의 수면 줄어들었다. 그래서 사해의 해안선은 수시로 달라졌다. 사해로 유입되는 주 수원은 상부 요단강이다. 상부 요단강은 레바논과 헐몬산의 몇 개의 샘에서 시작되어 강을 이루고 갈릴리 호수를 거쳐 하부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유입된다. 지질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사해 해안선이 바뀐 것을 과거에 형성된 토사층과 지형에 기초하여 확인한다.
대영제국 시절 마크 트웨인이 팔레스틴을 방문하여 남긴 기록에 근거하여, 19세기와 현재의 사해를 비교할 수 있다. 14세기에서 19세기는 유럽의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린다. 그때에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당시 사해 수면은 매우 낮았다. 그리고 그 이전 십자군 시대인 11세기 중반에서 13세기까지는 매우 온화한 기후를 형성했는데, 당시 사해 수면은 크게 상승하였다. 더 이전에 사해는 큰 위기를 맞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비잔틴 시대(4-6세기), 헬라와 로마 시대(주전 1세기- 주후 1세기), 금석병용기 말에서 중기 가나안 시대(3450-1550 BC)그리고 신석기 초기(8500-5500 BC)에 사해의 수면은 매우 높았다.
사해의 해수면의 변화에 따라 사해 주변에 정착한 고대 주민들의 생활도 변하였다. 사해의 동쪽 모압 산지의 헤스본은 사해의 수면이 상승했을 때는 정착 인구가 많았던 반면, 사해의 수면이 낮아지면, 인구도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수면이 줄어 사해 가까이 접근이 가능했고 마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대(철기 시대로써 1200-586 BC)는 이런 변화와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시대 특히 주전 8-7세기, 사해 인접한 곳에서 고고학 유적들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적지들은 모압 산지로부터의 공격을 위한 방어와 사해의 자원을 이용할 목적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Mezad Mazal, Mezad Goza, Qumran, En Gedi)가 있다. 그리고 이 유적들은 헬라 시대 말과 하스모니안 시대인 주전 3세기에서 1세기에 다시 재건되어 사용되었다. 이곳은 전략적인 면과 자원을 활용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들은 사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하스모니안 시대부터 헤롯 시대에 걸쳐 형성되었다 (141-70 BC). 마사다에서 발견된 나무의 탄소연대 측정에 따르면, 당시는 지금보다 습한 기후를 형성했으며 여리고, 쿰람, 마사다와 Ein Feshkah, Turabeh, Ein Gedi, En Bokek, En Tamar는 주후 1세기 수원지를 끼고 있었으며 크게 번성했었다.
샘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와 물을 저수하는 정교한 저수조 그리고 일 년에 몇 차례 내리는 물을 저수하기 위한 댐도 만들어졌다. 이곳은 유대 국가의 동쪽 경계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 같은 수로 시설들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정착지의 주민들과 향유(Balsam)와 종려나무를 재배하기 위한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인 보켁(En Bokek)의 남쪽은 유다와 나바티안의 경계 지역으로, 나바티안들은 원거리 대상인들로서 향유와 향료를 독점 취급하였다. 나바티안들은 사해 인근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향료와 향유를 페트라, 아라비아 또는 네게브를 가로 질러 가사(Gaza)를 거쳐 이집트 또는 북쪽 메소포타미아, 유럽, 아시아로 무역하였다. 사해의 인근 지역은 종려나무가 특히 잘 재배되었다. 신명기 34:3절에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으로 기록되었다. 종려나무에서 열매, 꿀 같은 시럽, 쥬스가 생산되었다.
또한 사해에서는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하여, 또 음식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소금이 무한정 생산되었다. 히브리 성경에는 사해가 소금바다로 기록되었다(Yam ha-Melach) (창14:3, 신3:17, 수3:16). 사해의 소금 함유는 30%가 넘는데 이는 지구상의 그 어느 바다 보다 소금 함량이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미생물이 사해에서는 죽지 않는다. 일부 미생물(microorganisms)과 녹조류(green algae) 그리고 붉은 박테리아(red bacteria)는 사해의 높은 소금 함유에도 견디어 살아 있다.
사해의 북동쪽에는 헤롯이 죽기 전 치료를 목적으로 이용하였던 Callirhoe 온천 수원지가 있다. 사해의 남쪽에는 Qazone이 있다. 이곳에는 약 3500개의 무덤들이 즐비한데 거의 대부분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무덤들이다. 인근에 Mazra’a가 있다. 최근 Qazone을 발굴하여 토기 종류와 천, 가죽 그리고 천에 싸인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사해의 건조한 기후는 문화적인 유적지가 훼손되지 않고 오래 보존되는 원인이다.
하스모니안과 로마 시대에 사해에는 배 선착장이 건설되었다. 당시 사해 수면은 지금보다 약 25미터 높았다. 선착장은 사해의 서쪽 Khirbet Mazin에 있었다. 선착장에서 사람들은 배를 이용하여 사해의 동쪽인 Callirhoe의 온천으로 가는데 이용되었다. 선착장은 북쪽에는 Rujm el Mahr와 남서쪽에는 엔게디와 마사다 인근에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선착장 가운데 하나는 배를 보호하고 사해의 강한 소금으로부터 배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도 갖추었다. 현대에는 강한 염분에 배가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 재료를 사용하지만 당시는 나무와 쇠로 배를 만들었으되 부식을 막기 위하여 물로 배를 세척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사해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해는 히브리어로 ‘소금바다’라 부른다. 라틴어로는 루카스 아스팔티티스(Lacus Asphaltitis)로 불렸는데 이것은 아스팔트 또는 역청 호수라는 말이다. 고대에 역청은 배를 건조하는 방수 목적과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해에서 생산되는 역청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리아를 만드는 방부 목적으로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사해를 역청과 관련하여 생각했던 것은 당시 사해에는 역청이 물 위에 떠 다닐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1950년대에도 사해에는 어른 보다 큰 역청이 물에 떠 다녔고 무게는 1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 사해에 역청이 많이 생산되는 이유는 지각의 움직임으로 역청이 지표면으로 분출되었기 때
문이다. 지금은 역청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는 지각의 움직임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사해 많은 곳에서 역청이 물에 떠다니며 그 모양과 크기는 마치 목 베임을 당한 거대한 황소와 유사하다’고 기록하였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창세기 14:10절에는‘사해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다’고 기록되었다. 역청에 해당되는 헤마르는 아스팔트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이다. 이것은 사해 밑 또는 인근에 거대한 유전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할 헤마르(Nahal Hemar)는 역청 골짜기라는 말인데, 실재 사해 남서쪽 역청 골짜기를 방문하면 석회암 지층에 역청이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 페이지의 사진을 참고). 또한 한 여름철에는 검은 역청 기름이 뜨거운 햇볕에 녹아 흐르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해에는 약 80억에서 100억 배럴의 기름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 유전을 조사한 결과 사해의 기름은 상업적 가치가 없는 기름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구상의 거대한 유전지대는 교묘하게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피하여 중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발달되었다.
사해의 동쪽은 사암과 기타 다른 암석이 발달되었고, 사해의 서쪽은 주로 석회암이 발달되어 이곳에는 천연 동굴들이 발달되었다. 대부분의 동굴들은 오랜 기간 용해되면서 형성된 동굴로써 공룡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에 이런 동굴들은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엔게디 동굴로 피신하였다 (삼상 24:1-3). 1차 유대인 항쟁(66-73 AD)과 2차 유대인 항쟁(132-135 AD) 때에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저항하여 유다 광야의 이런 동굴에 피신하였다. 쿰란 일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 역시 이런 동굴에 숨겨졌던 것들이다.
사해의 동쪽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은 사피(Safi) 마을 위에 있는 롯의 동굴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유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사해의 남서쪽 이스라엘 지역에는 소금산이 있다. 또한 아무 연장 없이 손으로 쉽게 파지는 연한 석회질로 이루어진 지역도 있다. 쿰란 일대가 대표적인 곳으로 이곳은 진흙이 침전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곳은 쿰란 일대이다. 세례 요한은 이곳 유다 광야에 거하였고 광야로 나오는 백성들에게 천국의 메시지를 증거하였으며, 샘이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사해의 동쪽 모압 산지와 서쪽 유다 산지는 고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동쪽 산지는 서쪽 보다 훨씬 높다. 유다 산지는 사해 인근까지 약 300-500미터 절벽을 이루지만 그러나 동쪽 산지는 900미터 이상의 급경사를 이룬다. 사해의 남쪽 아라바 광야의 동쪽에 위치한 에돔 산지와 서쪽 이스라엘 쪽에 위치한 네게브 산지는 1500미터 이상 된다.
사해의 수면이 지금보다 높았을 때에 동쪽 해안은 가파른 산이 사해의 물과 직접 맞닿아 통행이 불가능하였다. 반면 서쪽 해안은 유다 산지의 높은 곳에서 깊은 골짜기를 따라 물이 사해로 흐르면서 토사가 운반되어 작은 평지를 이룬 곳들이 있다. 사해의 수면이 낮아진 이후 서쪽은 물론이고 동쪽도 사해 해안을 따라 통행이 가능해졌다.
현재 사해의 수면은 해수면 422미터 더 낮다. 수면은 해마다 1미터 정도씩 낮아진다. 사해의 깊이는 북쪽이 남쪽에 비하여 훨씬 깊다. 수면으로부터 깊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그러나 남쪽은 현저히 낮아 사해 바닥이 드러나 현재 사해는 둘로 나뉘어졌다. 10년 전에는 요르단 지역 사해 해안을 따라 도로가 없었다. 또한 쿰란 근처의 에인 페쉬카(Ein Feshka) 남쪽 역시 사해의 물이 25미터 상승하면 모두 잠긴다. 지난 50년간 사해는 25미터 이상 물이 감소하였다.
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