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그중에 하나다. 인류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주장이 가끔 매스컴을 장식한다. 독일계 스위스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행복해 진다는 것>이라는 시에서 인생의 의무가 행복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이하 생략)
행복을 수치(數値)로 매길 수 있다?
이 땅에 태어나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헤르만 헤세가 읊은 것처럼 인생의 의무는 행복 추구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인간 존재의 목적은 행복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영국 런던대학교 퀸즈메리칼리지 소속으로 문화사 교수인 리처드 스코시(Richard Schoch)는 자신의 책《행복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행복은 유망 성장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자기계발서의 1년 매출액은 10억 달러며, 지구촌 항우울제 시장은 놀랍게도 170억 달러에 육박한다.” 매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가별로 생활의 만족도와 풍요로움을 지표화한 행복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이 행복지수는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 실업률, 자부심, 희망, 사랑 등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산출된 지표이다. 2012년 기준의 행복지수에 따르면 OECD 36개 회원 국가 가운데 미국은 3위, 한국은 24위를 했다.
이러한 통계가 말해주듯 현대인들은 행복을 수치로 매길 수 있고, 마치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듯이 행복을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도 국민 행복 시대를 외치며, 관련 공약들을 쏟아낸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의 유형도 다르고, 행복을 느끼는 정도도 다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 가치여서 그 정체가 늘 모호하다. 누구나 행복을 말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행복’이라는 단어의 이력서
‘행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해피니스(happiness)’는 그 어원이 ‘일어나다(happen)’에서 파생되었다. 이것을 보면 행복이란 원래 인간 스스로 통제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기회와 행운을 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영웅들조차도 행복을 자신들 마음대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의 손 안에 놓여 있는 천상의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행복의 이해는 고대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내려 오면서 천상의 것에서 지상의 것으로 그 행복의 의미가 서서히 바뀌었다.
지상의 것으로서 누구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취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개념은 그 역사가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말 영국의 법학자이자 공리주의 철학자였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유명한 명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기원되었다.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에서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고대적 의미의 행운 대신, 쾌락을 행복으로 이해한 벤담의 의미 전환은 당시로서는 낯선 것이었다. 따라서 벤담에 따르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에 있었다. 벤담이 남긴 영향은 우선 행복을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행복의 양화(量化)였다. 그러나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른데, 길이와 무게를 한가지 단위로 통일해 계산할 수 없듯이, 모든 행복을 수치로 계산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주택 평수와 통장 잔고와 은퇴 연금의 액수로 과연 행복을 잴 수 있는가? 돼지처럼 진창에 뒹굴어도 그 나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최대 다수만 기준으로 삼는다면 소수의 행복이 설 자리는 잃게 된다. 다수의 횡포로 인해 정의의 문제가 자연스레 발생한다.
크리스천·크리스천 공동체의 행복 기준
우리 크리스천이나 크리스천 공동체가 누리는 행복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개인의 이익과 쾌락 추구 위에 행복의 토대를 쌓는 것은 분명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매력적인 명제이기는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비유와는 공명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행복은 우선은 ‘엔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다. 행복의 원천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전 8:9). 참된 쉼(마 11:28)도 평안(요 14:27)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적 영성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이름이다. 두 번째는 자족(自足)의 원리다(빌 4:11). 하버드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 교수는 우리가 행복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이다. 욕심을 욕심으로 채우려는 한 행복 지수가 아닌 불행 지수만 상승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나 부모로 하여금 망연자실케 했던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행복 전도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들을 섬기는 태도에서 행복은 싹튼다. 행복이란 개인적 차원도 있지만 사회적 차원도 있다. 축적된 자본이 사회적으로 적절히 배분되어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을 누릴 때, 행복한 공동체가 조성된다.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속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자라는 진정한 행복을 본다. 탐욕의 문화에 찌든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의 원리로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 행복으로부터 크리스천의 행복을 가름하는 기준이면서 크리스천 됨의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