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근 목사
(Photo : ) 박성근 목사

어느 젊은이가 억울하게 행한 실수로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실수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흥분한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그에게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잘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 줄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젊은이가 믿고 사랑하던 친구가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 친구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자신도 무언가 젊은이에게 던져야겠다고 생각하고 길 옆에 피어있는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무수히 쏟아지는 돌멩이에도 잘 견뎌내던 젊은이가 그 장미꽃 한 송이에 맞자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미꽃은 거의 충격을 주지 않는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수 많은 돌멩이에도 끗끗하게 견뎌내던 젊은이가 어떻게 작은 장미꽃 한 송이에 쓰러졌을까요? 물리적 무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깊은 상처는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주는 상처입니다. 내면에 주어지는 아픔이 객관적 아픔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원수나 모르는 사람이 던지는 돌멩이는 아무리 강한 충격을 주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몰라서 그럴수도 있고, 혹은 대적하기 위해 일부러 쏟아붓는 비난이기 때문에 큰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비난의 비수를 들이대면, 그땐 충격이 큽니다. 마음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면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아픔이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거절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자기 백성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를 배신하고 관원들에게 넘겨준 장본인이 3년을 함께 했던 자기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아픔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그 상처를 잘 이겨내셨습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이 해야 할 사명이 여기에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상처의 희생자(victim)가 아닌 상처의 치유자(healer)가 되셔야 할 사명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이기기엔 벅찬 상처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치유자로 살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