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반가운 봄비를 맞으며 거리마다 파릇한 행진이 시작된 지 오래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앙상하게 드러냈던 벗겨진 나무표피를 뚫고 어린아이 살갗 같은 연둣빛 새싹들이 갓난아기 같은 신비로움으로 저마다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 새싹뿐이랴? 솜사탕을 뜯어 놓은 듯 하얗고 눈부신 꽃봉오리들이 가지 끝에 풀도 없이 붙어 있다.
살랑살랑 미풍에도 떨어질듯 아스라한데도 시간이 갈수록 우아한 자태를 맘껏 뽐내는 꽃나무 가로수들…. 운전대를 잡고 흘깃거리며 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정경들이어서 아예 차를 멈추고 새봄을 노래하는 곳으로 달려가 황홀한 가슴을 두발에 실어 내렸다.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다. 새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숨은 솜씨를 인간에게 보여주는 은혜가 바로 봄인 것이다.
조금 있으면 강렬한 태양빛을 견뎌내느라 연한 싹들은 질기고 강한 청록 빛 잎사귀들이 되어 버리겠지. 그리곤 찬바람에 부딪기다 소리 없이 아스팔트위로 떨어질 테니 말이다. 우린 늘 보이는 것에 익숙해 하고 보는 것이 다 인냥 착각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가득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나오는 점보다 작은 겨자씨를 보면서 많은 새가 깃들이도록 하늘 향해 뻗을 수 있는 아름다운 거목을 상상할 수 있을까? 물속에 잠겨있는 연꽃잎 속에도 이미 그 화려하고 넉넉한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사과나무도 꽃이 피기 훨씬 전부터 맛있고 탐스런 사과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기에 인내와 사랑으로 물을 주고 가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인생에도 감추어진 사랑의 법칙들이 일마다 때마다 즐비하게 서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부모의 소망이 가득한 이름들을 준비해 놓곤 한다. 그 이름 석 자에 담겨진 온갖 꿈과 기대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눈앞에 보여진다. 짧은 이름 안에 감추어진 소망들을 꺼내려고 서두르면 아예 열매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자녀라는 나무를 소중히 가꿔야하는 부모들…그러나 가면 갈수록 어려운 것이 자녀양육이다. 우선 내 뜻을 접고 그 안에 감춰진 놀라운 보물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세심하고 겸손한 섬김을 쉬지 않아야만 이름값을 하는 아이들로 우뚝 세워질 것이다.
마음에 가득한 소망처럼 자녀가 자라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일단 기다림의 법칙을 매일을 삶속에서 밥 먹듯이 지켜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고 사는 믿음의 분량이 온몸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뜨거운 용광로의 사랑이라도 자녀의 나이와 특성에 맞추지 않는다면 사랑의 화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눈높이 사랑이 매순간 필요함엔 두 말이 필요 없다. 눈높이를 맞추려면 일단 내가 무릎을 접고 몸을 낮춰야만 한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는 12세 막내부터 16세 셋째까지도 다시 새롭지만,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둘째와 대학원생인 24세 큰아이의 엄마로 여섯 명의 자녀에게 매일 눈높이를 맞추는 자세가 수도 없이 요구된다.
때로는 힘에 부칠 때도 있고 무릎관절에 통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여섯 자녀 안에 숨겨진 놀라운 보물들을 3초만 상상해도 어느 새 그 통증들은 놀라운 감사와 환희로 바뀌어져 있음을 실감한다. 이제 곧 푸르른 거목들이 되어 세상을 살려내고 맛난 열매로 풍요로워질 나의 아름다운 여섯 나무들…오늘도 그 안에 감춰진 황홀한 행복이 아름다운 봄의 교향곡과 함께 어깨춤을 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