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새해가 시작되면 지나온 해에 자신들을 되새겨보고 새로운 힘을 가지고 비전을 향해 누구나 다 앞을 향해 달리고자 마음을 먹게된다. 그런데 며칠이 못가서 그 꿈을 향해 나가가기도 전에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바라는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힘들 것같고 환경이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두려움감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이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고 하는 힘을 누르게 하고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 안주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몸무게가 5톤 이상 되는 코끼리를 동물원에서 훈련시키는 조련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아기 코끼리를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아기 코끼리의 다리에 밧줄을 동여매고 멀리 가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리에 있는 나무에 묶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더 이상의 거리를 벗어나려 하지 아니하고 묶여진 범위안에서만 움직이며 그 속에서 주는 먹이만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머리속에 어릴때부터 박히게 되면 커서도 멀리 벗어나면 안된다는 두려움감이 자리잡기에 특별히 조련사가 염려하지 아니하여도 제한된 공간에서 코끼리가 살아가는데 문제가 하나도 없게 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코끼리는 죽을 때까지 동물원의 철장밖 정글의 세계를 한번도 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을 통해 자유함을 갖지 못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세상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 생각한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 모습은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인본주의 중심으로 인간이 우상화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이 주는 것은 남녀의 결혼관이 파괴되어 동성애가 합법화 되는 것이며 황금 만능주의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의 신뢰성이 깨어지고 마약과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병든 사회가 되어버리는 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갈매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샌프란시스코 시내 부둣가의 어느 광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부둣가 주변에는 많은 음식점과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거리였다. 부둣가의 바위에 떼를지어 몰려 있던 갈메기들은 광장에 지나가는 관광객 누군가 먹이를 던지는 것을 보면 그 먹이를 먹기 위해 우르르 날아와 각자가 먹을 것을 먹게 되는데 그중에 자신있게 먹지 못하고 조금 멀찌감치 서서 다른 갈매기들이 먹는 것만 바라보는 새들도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용기를 내어 먹을 것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 했다가는 힘센 갈매기에게 물리지 않기 위함이다. 갈매기들의 모습을 보면 강한자는 더 많이 먹게 되고 약한자는 강한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어두움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를 본다. 그래서 갈매기는 텃새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도 없는 갈매기들의 세계는 집단적인 이기주의 세상이며 그러한 세상은 빛의 소망을 찾아 볼 수 없는 어두움과 두려움의 세계라 본다.

어두움의 세계는 한 세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대의 자녀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어 고통과 불행을 주게 되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적인 도덕성과 양심의 윤리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처럼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하던 어느날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인데 집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하였는데,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어두운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만약에 그 가로등이 없었다면 밤의 세상은 온통 캄캄하여 힘든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 본다. 벤자민 한 사람으로 시작된 등불이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밝게 하는데 큰 힘이 된것이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처럼 빛도 어두운 가운데 빛을 본 사람많이 그 빛을 나누어 줄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빛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손으로 만드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며 빛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함을 받은 자는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빛의 삶을 살게 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

빛이되신 예수님 때문에 빛의 자녀는 어두움에서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일어나서 미래를 개척하고 도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인간은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극복을 위해서는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무리 세상의 단체가 사회정의와 환경회복을 외치며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의 영적인 개혁이 없이는 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두번째는 믿음을 통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리아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영이 회복되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에 푹푹 썪게 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정오에 임하는 빛을 보지 못하 게 되는데 그 빛을 보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만이 가능하다. 강영우 박사가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장애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my disability, God’s ability”. 이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빛을 바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는 축복된 사람이다. 모든 만물은 주님을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으며 모든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다. 이것이 빛을 본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축복이며 그 은혜를 나누기 바란다면 지금 그 어두움에서 일어나야 한다.


문의전화)425-773-9307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