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다쟁이다. 아마도 마음이 보드라운, 따뜻한 사람이라서일까. 옆에 누군가 있을라치면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상대가 비단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 초면이라도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 상대방의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 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그것도 재능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말하는 재주를 비지니스에 접목시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멀리서 여행 온 객들을 맞이하는 걸 업으로 삼고, LA 유일의 허가 받은 보딩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 김성전 장로 이야기다.

장차 호텔리어가 꿈인 그는 올해로 쉰 다섯을 맞았다. 20여년 째 한 교회만을 섬겨오고 있는 의리파다. 세계성경장로교회 강신권 목사가 그의 신앙적 멘토다.

상해임시정부 요원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부친과 산부인과 의사인 모친 슬하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세 형들은 모두 의사. 그도 한때 집안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의대에 지원했지만, ‘주먹짱’, ‘학교 어깨’ 소릴 듣던 혈기 왕성한 학창시절을 보낸 그에게 운명의 신은 비껴갔다. 결국 보기 좋게 낙방한 것. 실망을 안겨드린 건 물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고, 한동안 반항심과 좌절감에 빠져 건달 같은 생활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잘 몰랐던 터였다.

그러다 미국 유학 중이던 친구의 권유로 도미의 꿈을 꾸게 됐다. 당시만 해도 학부, 대학원을 통틀어 한국 유학생이 10명도 채 안 되던 때였다. 부모님께 드렸던 실망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열심히 공부해 유학 준비를 마쳤고, UC 리버사이드에 당당히 합격해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지금 돌아보면 30년 전 그렇게 미국에 온 것이 예수님을 믿고 장로까지 된 계기가 됐다”고 그는 말한다.

1985년. 그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남자 중의 남자이자 뼛 속까지 존경했던 부친이 소천하시던 날, 하관예배 도중 예수님을 만난 것. 이날 집례를 맡았던 김문희 목사(서울대신교회)가 읊조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딤후 4:7-8)라는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헌날 패싸움에 휘말려 뻑하면 경찰서에 붙들려 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형제들 중 유일한 총각이자 막내였던 탓에 형들보다 갑절은 많이 울었던 듯. 그렇게 부친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생전 효도 한번 못해드린 후회에 가슴을 쳤다. 그리고는 훗날 반드시 성공하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사 직분을 받고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본받아 진정한 신앙인이 되겠노라고도 생각했다.

그해 여름. 한국 방문을 위해 올라탄 기내에서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 김선희 권사를 만났다. 동석한 유학생 친구의 실수 탓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인해 만나게 됐고, 편지와 전화로 13개월의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술이었던 그가 술과 담배를 끊게 된 데엔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가정적이었던 그가 아내의 첫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문병차 온 강신권 목사의 기도를 받게 됐고, ‘첫 아들을 주시면 주초를 다 끊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난 후 그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모든 걸 끊었다. 주위 친구들은 ‘독종’이라 했지만 그는 “이는 독종이라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성령의 역사”였다고. 담배를 끊은 후 금단 현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지만, 담임목사로부터 배운대로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되뇌며 이겨낼 수 있었고, 그렇게 서서히 믿음이 자라갔다. 삶 가운데 이슬비처럼 스며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몸담고 있던 교회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다. 당시 서리집사였던 그는, 새롭게 개척할 교인 77명을 위해 생업을 팽개치고 LA 카운티 내 교회 100여 곳을 찾아다니며 예배당으로 쓸 처소를 구하고자 두 달 여간 찾아 헤매였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다 드디어 멋진 미국 루터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됐을 땐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누군가의 부탁이나 명령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를 전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그는 고백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교회 친교실에서 밥을 해먹기 때문에 바퀴벌레가 생긴다며 트집을 잡는 미국 루터교인들의 천대에 할 수 없이 그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여러 장로들의 건의로 새성전 구입을 당회에서 결정하고 건축헌금과 작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말한다. ‘교회 건축을 시작하면 어둠의 세력이 깃든다’고. 신앙에 죽고 살 것 같았던 교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그 당시로는 큰 액수였던 1만불씩 작정한 장로들조차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 사이 담임목사와 성도들은 벌써 한 교회 건물을 두고 에스크로를 오픈한 상태였고, 기한 내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재정이 넉넉치 못한 교회 형편상 막대한 금액이 날아갈 판이었다. 재정적으로 힘이 될 만한 성도들이 없던 가운데 오랫동안 재정부 일을 담당하는 장립집사였던 그에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8)라는 이신득의의 말씀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기왕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 주께서 바깥으로 내몰기야 하실까.”

그는 모친이 마련해 준 첫 집을 식구들조차 모르게 코싸인(집 담보로 보증서는 것)하여 마침내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건축으로 인해 교인들이 많이 떠난 상태에서 건물 월부금은 힘에 겨웠고, 처음 2-3년간 생활비도 없이 교회 건물 월부금부터 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이 베푸셨던 기이한 일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분은 분명한 뜻과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나를 이끌어 오셨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사업이 성공하기까지 물론 실패의 고배도 마셨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그의 삶에 개입해 역사하고 계셨고, 그와 함께 하셨다. 현재 그의 아내 김선희 권사는 모 의류회사 부사장으로, 5년 전 장로장립 받은 그는 LA 타운 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보딩하우스 3개를 운영 중에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는 짤막한 기도를 드리면서 그는 여운을 드리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김성전 장로는 누구?

LA 유일의 허가 받은 정식 보딩하우스 3개를 운영 중인 사업가다. 1호점 프라임 게스트 하우스를 비롯해 2호점 윈저하우스, 3호점 옥스포드 맨션을 소유하고 있다. 아내 김선희 권사와 미육군장교로 근무하며 롱비치에 위치한 고등학교 수영팀 헤드코치와 주니어 R.O.T.C 교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재형, 그리고 UC 산타크루즈 4학년에 재학중인 딸 지나가 있다. 세계성경장로교회 강신권 목사를 신앙적 멘토로 이 교회를 20여년 째 섬겨오고 있으며, 5년 전 장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