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함 2세 때, 앗수르왕의 앗수르당이 정치하던 17년간(BC771~754)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뽑아 택하셨다는 선민사상의 우월주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만 하나님 백성이고 그 외의 이방 민족은 지옥 갈 백성이라고 멸시 천대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오랜 세월동안 국토을 넓혀가는 제국주의 정치로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고 백성을 포로로 끌어가고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민족을 세계로 흩어지게 하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또한, 많은 피압박 민족들의 원한과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스라엘도 여러 차례 침략해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하면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챙겨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피해의식이 있어 오랜 세월동안 숙적(묵은 원수)인 그 나라가 망하기를 기대하고 하나님이 그 나라를 치시기를 기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밋데의 아들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1:2)하십니다.
그 당시 니느웨는 도시직경이 200리(한 사람이 사흘 길을 걸을)정도 된 큰 도시였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12만명이라고 볼 때 어른까지 합치면 니느웨의 인구는 30~4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제국주의의 중심 도시이므로 자기들이 점령해서 다스리는 식민지 국가의 최고의 특산품은 조공으로 바치게 해서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문물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래서 문물이 발달한 도시가 되었고 잘 먹고, 잘 입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잘 살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도 모르게 멀어지면서 짐승 같은 육체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불의와 죄악을 일삼게 되고 결국 이 도시는 죄악이 소용돌이치는 생지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성품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1. 요나의 편견된 영적 가치관
요나는 니느웨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두 가지 편견이 그를 사로잡았는데, 첫 번째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우리를 못살게 한 이방 민족을 위해 구원 얻으라고 복음을 전하고 회개시키는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곳은 죄악의 도성이고 깡패들의 천국이라 자기 생명이 죽임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두 가지의 편견 때문에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니느웨가 아닌 정 반대쪽의 다시스(스페인에 있는 항구)로 가기 위해 욥바(이스라엘의 수도, 340만 인구)로 가서 배를 타고 도망가게 됩니다.
가라하시면 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된 자세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요나는 자기 편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가는 요나가 탄 배에 큰 파도를 일으켜 뱃길을 막습니다. 장사꾼들과 같이 서남쪽으로 가고 있는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탄 장사꾼들은 각기 자기 신들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풍랑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이때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다가 불려온 요나가 제비에 뽑히게 됩니다. 잠언16:33 말씀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요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주목하며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며, 왜 너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느냐고 물을 때,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 백성은 멸망해야 한다는 자신의 고집과 편견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이를 막으시려고 풍랑을 일으키신 것과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그들에게 고합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하여 무리가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합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알고 있습니다. 작고 큰 일 당할 때마다 전 날의 죄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것은 죄 값으로 겪었던 불행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거역한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 요나를 통째로 삼키게 하셨고 고기 뱃속에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요나의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회개하도록 하신 이후 반대편 니느웨 가까운 뱃사장에 요나를 토하도록 만드셨습니다.
2.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하셔서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하십니다. 요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큰 성읍이라 삼일길인 성을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칩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
그러자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고 했습니다(욘3:7).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리게 되었고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들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 온 지역에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욘3:7-9)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룻길을 가면서 외치는 요나의 이 복음에 니느웨 온 도성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니느웨의 왕이 이렇게 회개를 서둘렀던 연고는 제국주의의 팽창세력으로 주변 국가를 못살게 굴고, 음란 방탕,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재촉했던 바벨론, 시날 평지, 앗수르 도시, 니느웨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자 하나님께서는 BC765년에 전염병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을 희생케 하셨고, BC763년 6월에는 일식을 일으켜 도시가 캄캄한 어둠에 처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몇 차례 경고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만들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넒은 사랑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염병과 일식으로 인해 자기들에게 무슨 재앙이 임할는지 두려워 하며 위축돼 있었고 회개할 준비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요나의 복음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비롯해 온 백성과 심지어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적 가치관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실 때에 가기만 하면, 우리가 그 일에 순종하려고 시작할 때부터 그 일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고, 또 그 일이 성취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지 말라’, ‘하지 말라’ 하심은 성도가 실패하는 고통과 불행을 주님이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지 말라’ ,‘하지 말라’ 했는데도 했다고 하면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본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마음이 아프시기 때문에 그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렇게 가지말라 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복종함으로 쓰임 받기를 힘써야지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요나가 고통을 재촉했듯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요나가 사흘 길을 가며 외쳐야 할 것을 하룻길 만 외치고 만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싹 쓸어 멸망시켜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는 정반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 일치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영적 성과도 올려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계속 붙들어 쓰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하나님 나라를 물려주십니다.
숙적이라는 원한이 요나의 사명 의지를 묵살하고 도망하게 한 것이며 원수의 회개하는 모습이 못 마땅해 하룻 길만 하고 그만둔 것입니다. 그래도 온 도성을 회개케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열심을 다해 할 때,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보내신 분의 명령대로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함께 하시며 그를 붙들어 쓰시고 명하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요나는 원수의 회개하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나님께 따집니다.“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시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하나님께 회개하는 니느웨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자신의 선교 성과를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에서 나가 산에 올라가 초막을 만들어 놓고 니느웨가 어찌되는가 보려 합니다.
요나가 초막을 만들어 성읍이 어찌 멸망하는가 살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태양을 가리게 하셨다가 이튿날 벌레로 박 넝쿨을 말리고 동풍(뜨거운 열풍)을 불게하여 요나가 혼곤할 만큼 견디기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도 요나는 하나님께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니느웨가 망하기를 기대하며 불평을 합니다. 인격이 없고, 생명의 존재가치, 영적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 망나니 같은 요나였지만 하나님은 박넝쿨 교훈을 통해 요나에게 이치를 설명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한 영혼도 귀하게 여기시는 분으로 요나와는 완전히 다른 영적 가치관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식 속에서 선민사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우월감을 버리고 세계선교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로 단단히 교훈하며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교훈을 굳게 붙들고 진리 정통,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히고 성령께 이끌리고 쓰임 받아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뽑아 택하셨다는 선민사상의 우월주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만 하나님 백성이고 그 외의 이방 민족은 지옥 갈 백성이라고 멸시 천대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오랜 세월동안 국토을 넓혀가는 제국주의 정치로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고 백성을 포로로 끌어가고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민족을 세계로 흩어지게 하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또한, 많은 피압박 민족들의 원한과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스라엘도 여러 차례 침략해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하면 자신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챙겨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피해의식이 있어 오랜 세월동안 숙적(묵은 원수)인 그 나라가 망하기를 기대하고 하나님이 그 나라를 치시기를 기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밋데의 아들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1:2)하십니다.
그 당시 니느웨는 도시직경이 200리(한 사람이 사흘 길을 걸을)정도 된 큰 도시였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12만명이라고 볼 때 어른까지 합치면 니느웨의 인구는 30~4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제국주의의 중심 도시이므로 자기들이 점령해서 다스리는 식민지 국가의 최고의 특산품은 조공으로 바치게 해서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문물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래서 문물이 발달한 도시가 되었고 잘 먹고, 잘 입고,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잘 살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도 모르게 멀어지면서 짐승 같은 육체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불의와 죄악을 일삼게 되고 결국 이 도시는 죄악이 소용돌이치는 생지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성품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1. 요나의 편견된 영적 가치관
요나는 니느웨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두 가지 편견이 그를 사로잡았는데, 첫 번째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우리를 못살게 한 이방 민족을 위해 구원 얻으라고 복음을 전하고 회개시키는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곳은 죄악의 도성이고 깡패들의 천국이라 자기 생명이 죽임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두 가지의 편견 때문에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니느웨가 아닌 정 반대쪽의 다시스(스페인에 있는 항구)로 가기 위해 욥바(이스라엘의 수도, 340만 인구)로 가서 배를 타고 도망가게 됩니다.
가라하시면 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된 자세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요나는 자기 편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가는 요나가 탄 배에 큰 파도를 일으켜 뱃길을 막습니다. 장사꾼들과 같이 서남쪽으로 가고 있는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탄 장사꾼들은 각기 자기 신들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풍랑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이때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다가 불려온 요나가 제비에 뽑히게 됩니다. 잠언16:33 말씀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요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주목하며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며, 왜 너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느냐고 물을 때,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 백성은 멸망해야 한다는 자신의 고집과 편견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이를 막으시려고 풍랑을 일으키신 것과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그들에게 고합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하여 무리가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합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알고 있습니다. 작고 큰 일 당할 때마다 전 날의 죄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것은 죄 값으로 겪었던 불행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거역한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 요나를 통째로 삼키게 하셨고 고기 뱃속에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요나의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회개하도록 하신 이후 반대편 니느웨 가까운 뱃사장에 요나를 토하도록 만드셨습니다.
2.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하셔서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하십니다. 요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큰 성읍이라 삼일길인 성을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칩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
그러자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고 했습니다(욘3:7).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리게 되었고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들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 온 지역에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욘3:7-9)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룻길을 가면서 외치는 요나의 이 복음에 니느웨 온 도성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니느웨의 왕이 이렇게 회개를 서둘렀던 연고는 제국주의의 팽창세력으로 주변 국가를 못살게 굴고, 음란 방탕,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재촉했던 바벨론, 시날 평지, 앗수르 도시, 니느웨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자 하나님께서는 BC765년에 전염병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을 희생케 하셨고, BC763년 6월에는 일식을 일으켜 도시가 캄캄한 어둠에 처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몇 차례 경고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만들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넒은 사랑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염병과 일식으로 인해 자기들에게 무슨 재앙이 임할는지 두려워 하며 위축돼 있었고 회개할 준비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요나의 복음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비롯해 온 백성과 심지어 가축까지도 금식하며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적 가치관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실 때에 가기만 하면, 우리가 그 일에 순종하려고 시작할 때부터 그 일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고, 또 그 일이 성취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지 말라’, ‘하지 말라’ 하심은 성도가 실패하는 고통과 불행을 주님이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지 말라’ ,‘하지 말라’ 했는데도 했다고 하면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본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마음이 아프시기 때문에 그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렇게 가지말라 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복종함으로 쓰임 받기를 힘써야지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요나가 고통을 재촉했듯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요나가 사흘 길을 가며 외쳐야 할 것을 하룻길 만 외치고 만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싹 쓸어 멸망시켜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는 정반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 일치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영적 성과도 올려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영적 가치관이 하나님과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계속 붙들어 쓰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하나님 나라를 물려주십니다.
숙적이라는 원한이 요나의 사명 의지를 묵살하고 도망하게 한 것이며 원수의 회개하는 모습이 못 마땅해 하룻 길만 하고 그만둔 것입니다. 그래도 온 도성을 회개케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열심을 다해 할 때,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보내신 분의 명령대로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함께 하시며 그를 붙들어 쓰시고 명하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요나는 원수의 회개하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나님께 따집니다.“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시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하나님께 회개하는 니느웨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자신의 선교 성과를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에서 나가 산에 올라가 초막을 만들어 놓고 니느웨가 어찌되는가 보려 합니다.
요나가 초막을 만들어 성읍이 어찌 멸망하는가 살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태양을 가리게 하셨다가 이튿날 벌레로 박 넝쿨을 말리고 동풍(뜨거운 열풍)을 불게하여 요나가 혼곤할 만큼 견디기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도 요나는 하나님께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여전히 니느웨가 망하기를 기대하며 불평을 합니다. 인격이 없고, 생명의 존재가치, 영적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 망나니 같은 요나였지만 하나님은 박넝쿨 교훈을 통해 요나에게 이치를 설명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한 영혼도 귀하게 여기시는 분으로 요나와는 완전히 다른 영적 가치관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식 속에서 선민사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우월감을 버리고 세계선교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로 단단히 교훈하며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교훈을 굳게 붙들고 진리 정통,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히고 성령께 이끌리고 쓰임 받아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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