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 송창식 등과 함께 대중가수로 20년간 가요계 활동을 하다 성령에 붙잡혀 복음전도자로 15년, 그리고 이젠 ‘사랑의방주교회’라는 이름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방익수 목사. 18일 오후 얼바인에 위치한 사랑의방주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시원 시원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얼바인 사랑의방주교회 방익수 담임목사. | |
신앙적 열정도 유전되는 것일까. 그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유전자를 받았다. 음악교사를 하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어머니는 부산의 어느 달동네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족도 내팽개칠 만큼 열정을 쏟아 부었다. 아들의 입장에서 방 목사는 그런 어머니가 내내 못마땅했다. 그의 눈에 어머니는 한마디로 ‘목회에 미친 분’이셨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머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 하지 말라던 엄한 어머니 밑에서 “정직하게, 말씀대로 살라”는 교훈을 배웠다. 그 가르침이 3대를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인 우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게 우선이었어요. 정작 자신은 천막에 거적대기를 깔고 자면서도 말이죠.”
방 목사는 4남매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종종 “너는 주의 종이다”고 말씀하셨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나실인(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별된 자)으로 드려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반항심도 생겼다. “어머니는 왜, 내 허락도 없이 저를 바치셨어요?” 어린 그에게 ‘나실인’, ‘사명자’란 개념이 이해될 리 만무했다. 어쩌면 가혹한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질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그의 집안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동생의 죽음이다. 동생과 나란히 자고 일어나 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방 안은 연탄 연기로 자욱했다. 옆에 누워 있던 동생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았다. 외출했다 돌아오신 어머니는 이내 혼절하셨다. 이 일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 되고 가족들이 다 뿔뿔히 흩어지게 됐다.
동생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인생은 그야말로 180도 변했다. 본인이 목사가 돼야 한다며 신학을 공부한 후 달동네 목회자를 자처한 것이다. 자식은 안중에도 없는 어머니는 어쩌다 돈이 생겨도 가난한 이들에게 퍼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너흰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거야”라는 위로 아닌 말로 위로해 주셨다. 지리교사였던 아버지는 옆에서 그런 어머니를 보다 못해 끝내 이민을 택하셨다. 미국에 건너오신 뒤에도 재혼하지 않으시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뒷바라지 한다며 열심히 돈을 벌어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셨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면서 신앙에 대한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목회에 미친 어머니를 보면서 ‘절대로 난, 목사는 안 될거야’라고 수없이 되뇌곤 했다. 그런 그에게 음악이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어깨에 통기타 하나 울러 메고 서울 시내 거리에서 유유자적하며 딴따라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자그만치 20년이란 세월을 말이다. 교육자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세상음악을 하면서도 “의리 빼면 시체”라고 할 만큼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순수한 영혼의 울림을 음악에 담고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음악에 비춰 자신뿐 아니라 바깥 세계를 봐 왔다.
“신기하죠. 그 때도 예수님은 늘 제 마음 한 켠에 있었어요. 마치 신발 속으로 굴러 들어와 발가락에 박혀있는 돌맹이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음악이 좋아 시작한 가수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리 평탄하진 않았다. 오히려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맞을 게다. 가요계 활동을 하면서 낸 음반이 안 팔려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다. 음반 내는데 돈을 빌려준 사장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무거운 빚의 무게에 눌려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듯 했다. 남한테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스타일인지라 정말이지 자살 직전까지 갔을 정도다. 그러다 90년대 어느 날. 사촌동생인 박종호를 따라간 청주의 어느 찬양집회에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라는 물음을 안고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겐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세상문화에 익숙했던 그가 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어머니뿐만 아니라 하루에 8시간 기도하는 아내의 내조도 한몫 했다.
성령 체험 후 이젠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6개월의 골방 기도 끝에 과감히 가수생활을 청산하고 복음전도자로 대중 앞에 다시 서기로 결단했다. 첫 집회는 싱가폴에서였다. 로마서를 들고 말씀을 전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눈물로 회심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방 목사에겐 중요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당시 “무엇보다 말씀이 우선이다. 그리고 말씀 사역하려면 기도해야 한다”며 방 목사를 붙잡아 주던 영적 아버지같은 존재, 바로 송신호 목사(한국 제자훈련원 원장)다.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처음 도입해 시작한 송 목사로부터 2년간 말씀대로 사는 법을 훈련받았다. “목사가 되지 말고 사람이 되라”는 송 목사의 가르침이 늘 그의 뇌리에 꽂혀있다.
그렇게 15년간 한국 기독교TV와 극동방송의 찬양예배 프로그램 인도자로 사역해 왔다. ‘영으로만’ ‘내 영혼아 잠잠하라’ 등의 찬양과 찬양워십을 진행하며 복음전도자로, 찬양사역자로 전세계 3천여 집회를 인도하면서 ‘말씀제일주의’가 그의 신조가 됐다. 집회로 마음을 닦는 이른바 ‘정화 작업’은 하지만, 남아있는 옛 습관은 훈련을 통해서만 청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한 신앙훈련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그가 시무하고 있는 사랑의방주교회. 줄여서 ‘사방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들었다. 말씀으로 회복되는 예배 공동체,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 공동체,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가정 공동체, 사랑과 헌신의 섬김 공동체, 찬양의 기쁨의 문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는 교회다. 방 목사는 “영성과 지성과 감성이 함께 하는 깊은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서 “정말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열매는 맺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곧 신본주의를 우선시하는 것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 “나에서 시작하는 건 인본입니다. 신본주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이며, 모든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죠.”
이렇게 인본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24시간 하나님 우선주의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을 따라 성도들도 신본주의를 핵심가치로 삼고 있다. 삶이 곧 예배여야 한다는 방 목사는 “모든 교회 구성원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며 “그 가운데 처음이 예배고 삶은 그 다음”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훈련을 하는 것이 쉽진 않지만 고집스러우리만치 육을 치면서 죄적인 습관과의 싸움을 해 나아간다. 기도도 적당적당히 하는 게 아니다. 하루에 5-6시간씩 무릎 꿇고 기도한다. 그것도 밤 12시부터. 교육도 마찬가지다. 뼈대있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선교보다도 교육을 최우선으로 둔다. “말하자면 ‘싸가지 훈련’입니다. 선교도 배운 사람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선교지에 가도 안 싸우더라구요.”
방 목사 특유의 까칠한 성격으로 제대로 된 예배와 기도와 교육을 고집하니 웬만한 성도라면 용광로 불같은 훈련을 견디기 힘들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 교회 성도들에게선 은은하면서도 잔잔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진다. 불같은 연단을 거친 알맹이들만 남아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면 과찬일까.
성도수 50명. 작다면 작은 개척교회지만, 알이 꽉 찬 알맹이들로 구성돼 있기에 교회 전체를 감도는 성령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 초대교회를 지향하는 사방교회는 7개 지교회 개척을 목표로 두고 있다. 오는 10월엔 LA 개척을 시작한다. “제대로 된 훈련을 거쳐 남은 자들이 500명 되면…”이라고 여운을 남기는 방 목사.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방익수 목사는 ?
방익수 목사는 타고난 음악성과 교육으로 얻은 음악적 재질을 바탕으로 세상 음악 속에서 살다 1996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아래 복음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그는, 헌신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방방곡곡을 비롯해 유럽과 호주, 동남아시아, 미주를 순회하며 찬양과 말씀을 통해 복음전도자로 사역해 오고 있다.
전세계를 다니며 ‘부흥 워십’을 통해 예배회복을 외쳐온 그는 복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의 충만함과 풍성하고 영성 넘치는 찬양으로 사람이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들이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 세상을 다시 변화시키는 현장, 바로 성령님의 놀라운 사역의 현장을 체험해 왔다. 2003년 하나님의 인도로 미국으로 이민한 방 목사는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사역을 펼쳐 나가기 위해 ‘디클레어 미션(Declare Mission)’을 설립했고, 사역의 중심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겼다.
미주에서도 집회 사역을 계속하는 가운데 많은 성도들의 권면의 기도와 교회를 세우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정교회 모임을 인도해 오던 그는, 2009년 4월 얼바인에서 사랑의방주교회를 개척해 시무하고 있다.
프로필
-찬양워십팀 화평케하는자 사역
-얼바인 사랑의방주교회 담임
-굿패밀리 미니스트리 대표
-미주 CTS TV <방익수의 찬양 여행>, 극동방송 <방익수의 Amazing Grace>, 미주복음방송 <방익수의 Amazing Grace> 진행
교회소개
사랑의방주교회(The Ark of Love Community Church)는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으로 정복하여 공동체를 살리는 교회”를 모토로 하고 있다.
주일예배는 주일 오후 12시 30분, 중·고·청년부 예배가 주일 오후 3시 30분에 있다. 이밖에 청년부 성경공부를 비롯해 화요 성경공부, 금요철야예배 프로그램이 있으며, 매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7시 Heaveners Worship이 있다.
주소) 13955 Yale Ave., Irvine, CA 9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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