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중앙교회. LA 한인사회에 비교적 잘 알려진 교회는 아니다. 포항 뿐 아니라 한강 이남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대형교회인 이 교회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목회와 사역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포항의 복음화율은 10%대다. 상당히 낮은 수치다. 그런데 포항시민 51만명 중 1만명이 포항중앙교회 성도다. 1년에 움직이는 예산만 1백억원이 넘는다. 마음만 먹으면 맨파워와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이 교회는 혼자 하지 않는다. 지역의 작은 교회와 함께 발맞추며 그들을 도와 지역 복음화 사역을 한다. 해외 사역을 할 때도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형제교회라 불리는 이민교회를 도와 그들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도록 뒤에 서 있는다.
그래서 이 교회는 ‘알 만한 사람만 아는’ 그런 교회가 됐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서임중 목사도 그렇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목회자다. 작년에는 뉴욕 한인교계 최대의 집회 할렐루야대회를 성황리에 인도해 유명세를 탔고 올해는 시카고 할렐루야대회를 인도한다. 한국의 대표적 정치 지도자인 故 박태준 총리에게 세례를 준 이도 바로 서 목사다. 그는 선거를 앞두고 예배를 찾아 온 박 총리에게 “표 얻으러 예배 왔다면 심히 유감”이라고 공개적으로 조언을 할 정도로 입이 매운 사람이었다. 결국 1991년 박 총리는 포항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포항제철 신화의 주인공이자 포항의 가장 최고급 지도자가 교회에서 무릎 꿇은 이 사건은 일간 언론에도 대서특필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박 총리가 별세한 후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진 사회장(社會葬)에서 서 목사가 축도하기도 했다.
이제 서 목사의 감추어진 목회 이야기를 들어 보자.
-포항중앙교회의 성장 스토리가 놀랍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통감(通鑑), 농심(農心), 예심(藝心), 시심(施心)을 목회의 중요한 요소로 꼽으셨습니다.
이 네가지 목회 요소는 오늘의 제 목회 현장이 있게 된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통감(通鑑)의 목회입니다. 통감이란 역사(歷史)란 뜻을 갖고 있는데 더 구체적으로, 역사는 지나온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통감은 지나온 사실을 오늘의 거울에 반사시켜 내일을 조명한다는 깊은 단어입니다. 어제는 오늘의 거울입니다. 오늘의 거울 앞에서 내일을 조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농심(農心)의 목회입니다. 한 해의 농사를 위한 기경(起耕)과 씨뿌림과 가꿈과 거둠의 함축된 용어가 농심입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목회를 할 때 그 목회 현장은 참으로 윤택하고 아름다움이 열매 맺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은 거둠의 시간까지 말할 수 없는 땀과 수고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농심의 목회입니다.
셋째는 예심(藝心)의 목회입니다. 농심을 씨뿌림이라 하면 예심은 가꿈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목사의 마음이 예술가의 심정이 되는 목회입니다. 다양한 화선지에 그림과 글씨를 통해 명작품이 되게 하는 화가의 마음으로, 다양한 돌을 가지고 다양한 걸작품을 만들어 내는 조각가의 마음으로 교인 하나 하나를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 가는 목회를 예심목회라 합니다.
넷째는 시심(施心)의 목회입니다. 목회의 기본틀이 나눔입니다. 베풂입니다. 그것은 구체적 개념의 예수님 사역입니다. 그것이 전도이며 구제이며 봉사입니다. 여기서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연출되는 복음의 생활이 가능합니다. 시심은 또한 성령님의 마음입니다. 낮아질 수 있어야, 겸손함이 있어야, 사랑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시심입니다. 이것은 목회의 거둠입니다.
-포항중앙교회는 예장 통합측에 속한 교회이지만 교단과 교파를 넘어 해외의 이민교회들과 형제 교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형제 교회란 무엇이고 이 관계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이뤄지고 있나요?
포항중앙교회는 세계선교를 목표로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협력 교회를 결연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호남권 중심의 광주 서림교회와, 중부권 중심의 청주상당교회와 형제 결연을 맺어 지역과 세대를 아우르는 목회 정책을 공동으로 시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해외에는 미주 지역 중 동부 지역에 뉴욕목양교회, 서부 지역에 세계성경장로교회, 남미 지역에 아르헨티나중앙교회, 유럽 지역에 프랑스 파리장로교회, 동북아 지역에 중국 연길교회와 천진 엘림교회, 동남아 지역에 인도네시아 열린교회와 형제 교회 결연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올 8월에 토론토 염광교회와 결연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형제 교회로서의 사역 내용은 첫째 목회정보 교환 및 공유입니다. 각 지역 교회가 목회의 장점을 상호교류하고 협력함으로 교회의 공동 발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교 협력입니다. 포항중앙교회가 세계 각 지역으로 선교 정책을 펼쳐 나가려고 하면 그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지만 지역 형제 교회를 통하여 선교 협력을 함으로 극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례로 인도네시아 선교를 위하여 현지의 열린교회가 부지를 확보하고 포항중앙교회가 선교센터를 건립하여 공동으로 선교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셋째는 다음 세대의 글로벌 지도력 향상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보다 쉽고 편리하게 국제적인 상황을 접하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상호 방문 및 공동 프로그램 운영으로 영적 성장과 성숙을 기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면에서 청년부의 단기선교를 통한 교류, 어린이 축구단의 상호 방문 교류, 의료선교팀의 활동, 당회 및 각 기관부서의 공동수련회를 통한 보다 안정적인 교회 발전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큰 위기라고 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며 해법은 무엇이라 보시는지?
한국교회의 위기라는 말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마치 말세라는 용어가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오늘에 이르도록 통용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위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한마디로 세속주의, 물량주의라고 표현되는 것인데, 이로 인해서 교회의 본질적인 주제, 곧 예배와 교육과 같은 내적인 성장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성장 일변도의 교회 현실은 지상 제일주의의 아픔에 함몰되어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없고 예배당만 있게 되는 우려의 현실화, 사회적 공신력과 영향력 상실, 교파 중심적인 교회론의 역기능 현상, 성직자 양산으로 인한 성직자 자격상실론과 함께 제기되는 지도력의 문제, 다음 세대의 영적 유산 상속의 불투명한 현실과 대안 부재, 기독교 가치관 타락, 일부이지만 종교권력화 현상 등은 그 나라(천국)에 대한 믿음과 그 분(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세상적인, 가시적인 것들에 치중해 버린 소위 물량주의적 병리현상에서 기인해 필연적으로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 진단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위기감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위기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봅니다.
서구교회의 역사를 말하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그 전철을 무서울 정도로 밟아가고 있음에도 마치 한국교회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위기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사라지고 예배당만 남아있는 유럽이 오늘 한국교회의 거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는 위기와 진단을 제기하고 풀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아직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더 몰락하기 전에 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위기를 감지하고 대안을 수립하여 한국교회만의 힘을 상실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대안은 무엇일까요? 문제를 역추적 하면 됩니다. 즉 대형교회가 문제라면 대형교회들이 지역의 작은 교회들과 연합해 지역 복음화를 도와야 합니다. 대형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짓기 전에 작은 교회를 돌보아야 합니다. 작은 교회들이 무너지면 모두 함께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대형교회에 속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인식하고 지역교회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다수 시행하고 있습니다.
열은 있으나 빛이 없다는 위기진단이 나왔다면 빛을 발하는 교회로 변모되어야 하고, 세상과의 소통이 문제라면 소통 방법이 구체화 되어야 하고, 재정 투명성이 문제가 되면 보다 제도적인 재정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목회자의 자격론이 제기되면 신학교 경영문제와 관련된 현실적인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교회와 신학교가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인재 양성이 문제로 제기되면 교회학교 프로그램의 현실을 재점검하고 그 부분에 교회가 투자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책임 의식이 결여된 것이 문제라면 그 해답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문제 제기와 대안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이론적으로 제기해도 지도자들의 의식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해결이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자가 요구되고 칼빈과 루터가 그립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민교회에 주시고 싶은 조언이나 목회자들에게 당부가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지난해 뉴욕 할렐루야대회 강사로 초청받고 말씀사역을 하였습니다. 수없이 절제하고 또 절제하다가 가슴에 불타오르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령님의 강한 메시지를 결국 제 입으로 외쳤습니다. “뉴욕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너무 교만해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죽을 각오를 하고 쏟아낸 말입니다. 세계 제일 국가의 제일 도시에서 살아가는 한인교회와 한인교회 지도자들이 이 소리에 ‘아멘’ 할 분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이 상하기도 하리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할렐루야 대회에 참석하면서 이 한마디는 해야만 한다는 강한 마음의 소리, 성령님의 강권하심에 그 말을 외쳤습니다.
전체 메시지 중 축복의 메시지가 99%였다고 한다면 그런 직설적 권고의 말씀은 1%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때 직간접으로 제게 가해진 언어 폭력과 회초리는 엄청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너 자신이나 교만하지 말아라”는 항변이었습니다.
강단에서의 말씀은 그 기능이 어쩔 수 없이 약화되고 귀에 듣기 행복한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이민 목회의 현실이 되다 보니 너나없이 우리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기독교의 진정한 감동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한마디에 뉴욕교계의 중견 원로 한 분은 지상 칼럼을 통해 제가 백번 옳은 말을 했다고 반성하면서 “그것은 오늘 뉴욕교계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라고 기고하신 것을 읽어 보았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면서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 발전해야 하리라는 글과 말씀으로 공감하시고 격려해 주셨지만 그 이후 이민 교회에 대한 조언이나 목회자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 자체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조언이나 하고 싶은 말은 격려, 축복도 많고 중요하지만 충고, 권고의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축복 언어는 듣기 좋아 하지만 권고 언어는 듣기 힘든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조언하라면 교회도 목회자에게도 “축복받은 삶을 멋지게 연주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해외 한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본질은 축복받고 축복하는 차원 높은 삶입니다. 축복받은 사람이라면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 개념으로 말씀드리면 복음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 복은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해외 한인교회와 성도들, 특히 목회자들은 분명한 것 한가지 축복받은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민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 있는 여건과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축복받은 삶을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겨우 세끼 밥 잘 먹고 일상생활이 남보다 낫다는 비교 개념으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축복받은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면에서 이민사회를 선도할 거룩한 사명이 있기에 축복받은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민교회와 목회자들이 내가 받은 축복이 무엇이지 정직하게 멈추어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영적으로 현실적으로 인지했으면 그 축복은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민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원론적인 조언입니다.
-목사님은 뒤늦게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목사님의 사역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저는 40세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교육공무원으로 생활하다가 3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시작하여 늦깍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동안 정말 하루도 쉼없을 정도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인을 모를 두통으로 한달간 고생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깨닫고 곧장 학교에 사표를 내고 35세에 신학을 시작해 40세에 목사로 안수 받았습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나귀로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정말 주님은 저를 나귀로 사용하시는데 하루도 쉼이 없을 정도로 23년 동안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늦게 목사가 되어도 누구 못지 않게 쓰임받는 주님의 나귀가 되어 온 세계 전국 방방곡곡을 주님 모시고 주님 말씀을 대언하는 주님의 나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목사라는 악기(樂器) 를 잘 연주하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목사도 하나의 악기입니다. 똑같은 악기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청중들의 반응이 다른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귀를 막고 고개를 가로젓는 연주가 아니라 마음을 모아 경청하는 연주를 해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단에 설 때마다 목사의 악기를 연주한다는 생각과 마음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의 목회 현장의 성도들, 부흥회나 세미나에서 회중들이 저의 목사 악기 연주에 감동하고 아름답게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도록 몸부림 치는 목회를 합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에 관해 목사님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저의 목회 철학은 한 마디로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가르침이었기에 제 삶의 철학도 거기에 맞춘 것입니다. 저의 목회는 마태복음 11:28에서 출발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병들어 고난 가운데 헤매일 때 주신 말씀이었고 이 말씀으로 저의 목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제 목회 기본 방침은 “생명이 풍성한 교회”(요한복음 10:10)라는 명제 아래 치료하는 교회, 양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로 들어오는 모든 영혼을 치료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병든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목회 기본 방향을 설정했던 것입니다.
이 목회 철학을 중심으로 구약에서는 잠언 3:27 말씀,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13:14-15 말씀을 일상화 하고 있습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래서 한마디로 제 목회 철학은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 곧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으로 정의했고 지금까지 이 철학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여기서 정립된 목회 철학이 언행일치의 삶입니다. 구체적 행동철학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입니다. 인생도 삶도 목회도 나의 인격과 신앙도 절차탁마, 곧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인불학부지도(人不學不知道)를 두 기둥으로 세웠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그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의 삶이란 언제나 그렇지만,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나눔과 베풂이 있는 따뜻한 가슴으로 감격하는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푸름이 드리워진 목장을 가꾸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로의 노래가 되는 목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있고, 책망 받을 때 감사할 수 있는 목회, 미워함이 있을 때 기도하는 목회, 괴롭힘이 있을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내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감격할 줄 아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눈,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꺼지지 않는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 많은 이들의 아픔을 쓸어 안고도 남을 넓은 가슴으로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함축하면 절차탁마 목회입니다. 자르고 갈고 쪼고 닦음은 인격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지만 나는 무엇보다 목회에 필요한 교훈이라 생각되어 목회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네 목사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