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절,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이 먼저 나타나시게 하지 않고 예수님 앞서 선주자를 보내셔서 이러한 일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선지자들에게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전파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소리가 있지 않은가? 성령의 능력으로 외치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그 음성을 들을 때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게 된다. 그래서 전파는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으며 듣지 않고서 어찌 믿겠는가?

전파하는 것을 들을 때 속에 찔림이 있게 되고 생각의 전환이 있게 되며 따라서 자복이 일어나게 된다.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은 요단강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는 장사 지내는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이다.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끝낸다는 것이다. 구약으로 말하면 씻는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구약에는 씻는 예법이 있었다. 씻는다는 의미도 있고 또 물 속에 완전히 잠기기 때문에 끝낸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요한 때에 와서 침례가 된 것이다. 씻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끝나야 된다. 사람들은 우리는 죽기에 합당하다고 하면서, 더 이상 살아 있을 아무런 가치가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더럽다고 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이끌려 물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다. 바리새인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당시에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여기는 하나의 당파였다.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이 있고 ‘사두개인’이 있고 또 하나 ‘에쎄네’라는 파가 있었다. 이렇게 세 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에쎄네파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 나타난다.

바리새인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생겨났고, 당시 성행했던 헬레니즘 문화에 대항하여 율법수호자들로 자처하고 나선 무리이다. 그들은 구약의 모세 오경부터 선지서까지 모든 성경을 다 인정하고 거기에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며 무언가 경건하기 위한 많은 도덕적인 예법들을 만들어서 열심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 온 국민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말씀과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들을 잘 지키도록 영향을 주고자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라는 호칭은 자신들이 스스로 칭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붙여준 것 같다. ‘바리새인’이란 분별된, 구별된,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원래 그들 자신은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라고 했는데 그들이 너무나 특별하게 나타나다 보니까 하나의 당파로 형성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된 한 무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그 무리에 속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다. 자기들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 중에서 아주 훌륭한 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가말리엘도 그 무리의 사람이다. 사울도 전환하기 전에 바리새인이었고 그들은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의 대적이 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일을 자행하게 되었다(막 3:6, 15:1).

그런데 사두개인은 다르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믿고 다른 것은 다 믿지 않는다. 부활도 안 믿고 영도 안 믿고 천사도 안 믿는다. 오늘날로 말하면 현대주의자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가장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사두개파이다. 아마 사두개라는 말은 ‘사독’ 자손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독은 다윗 때 배반하지 않고 성전에서 충성되게 섬기는 제사장이었다. 사두개파들은 요한이 나왔을 당시 정치적인 세력과 힘을 많이 소유했던, 그 편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요한이 세례를 준다고 하니까 그에게 나아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까 이 두 종류의 사람들도 종교적인 활동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는 마음으로 왔는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종교적인 어떤 활동을 하는데 우리가 안 갈 수 있나 하는 마음으로 왔는지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들은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죄를 자복하고자 하여 온 것은 절대 아니다. 저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나 한 번 알아볼 양으로, 속에 교만과 의견이 가득하여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선지자 요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신약의 복음을 첫 번째로 전파한 자인 그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다. 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겠는가? 그들은 교만하여 자기들만이 소위 ‘영적이다, 최고다’, 또는 ‘우리는 너희들보다 낫다, 우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고 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그러니 우리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주께 감사합니다.’(눅 18:9-14) 이렇게 말하던 것이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또한 여러가지 씻고 닦고 하는 예법이 많다. 많은 지키는 것들이 있었다. 하여간 신앙심이 가장 좋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당시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연 다른 사람들을 많이 멸시하는 것이다. 자기들 말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없다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적이고 영적인 일들이 새롭게 광야 요단강변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이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왔을 리가 없다. 속에 뭔가 독한 교만과 시기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요단강에 나오는 그들을 향해서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한 것이다. 엄청 강하고 직선적인 말이다. 오늘 그 누가 점잖게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겠는가?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런 사람들이 장래 당할 일은 진노밖에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사람들은 임박한 진노를 피하고는 싶을 것이지만 마음이 이미 많이 높아져 있어서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요한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침례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 사람들은 회개하라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거기서 세례를 주면 자복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요한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요한은 그들의 회개한다는 입술의 말도 믿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말이든 할 수 있고, 남이 하면 얼마든지 따라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은 “하는 말을 가지고 말할 것이 아니라 열매를 가지고 얘기하자”는 것이다. 그들에게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말은 안 하지만 지금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저 물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왜 그런지 알아?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축복받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어.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복을 받게 되어 있거든.’ 이것이 그들 속에 품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한테 가도 죄인이라고 굽히지 않는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타락해서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내세우며 그 죄악된 상태를 뉘우칠 마음이 전혀 없었다.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더 이상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할 뿐 실제로는 아브라함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바리새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나를 이렇게 대우하지 않았느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주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대들었다. 여기서 요한의 말은 무엇인가? ‘너희는 아브라함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방인들, 그들은 정말 돌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다.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참된 그의 자손이 된 것이다.

10절,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한은 좋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러한 상태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는 다른 것이 아닌 도끼밖에 없다. 도끼는 낫이나 칼과는 다르다. 도끼가 뿌리에 놓여 있다는 것은 뿌리까지 완전히 끝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운명은 도끼이다. 도끼는 아예 밑둥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남김없이 끝내겠다고 할 때 쓰여지는 단어가 도끼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행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오랜 후에 도끼가 놓여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도끼가 뿌리 위에 놓여져 있다는 말이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엉겅퀴에서는 포도 열매가 맺힐 수 없다. 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는가? 속에 악독이 가득한데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는가? 그러니 이 사람들이 심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도끼로 찍을 뿐 아니라 다 불에 던진다고 했다.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의 사역은 회개의 사역이다. 이 바리새인 중에서도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이러한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보면 요한은 죄인들에 대해서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부담을 많이 가졌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 우리 같으면 가능성 없는 사람은 말도 안 한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고 그러한 자들도 돌이키기를,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표시이다. 이런 자들 중에 회개한 한 사람이 있으니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자였지만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것은 요한의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이고 주님의 세례는 성령과 불의 세례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성령과 불을 둘 다 성령의 방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여기의 불을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갈라진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불은 성령을 수식하는 게 아니다. 앞의 물이 문자적인 물이듯이 뒤의 불은 문자적으로 불이어야 한다. 한 구절에서 물과 불을 하나는 상징적으로, 하나는 문자적으로 말할 리가 없다. 그리고 성령과 불이 한 가지 뜻이라면 굳이 두 가지를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세 단어에서, 물과 성령이 그대로 말해졌기 때문에 불도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의 10절과 12절에서 태우는 ‘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11절의 불만 성령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의 불은 문자 그대로 불이라고 알면 된다. 따라서 주님은 두 종류의 침례를 주시는데, 하나는 성령 침례이고 또 하나는 불 침례이다.

그러면 성령 침례는 언제 받는가? 천국이 시작될 때이다. 불 침례는 언제 받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것으로서 천국이 끝날 때이다. 불 침례는 지옥 불에서 다 멸망한다는 뜻이다.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부어 주었던 성령의 세례이다. 그것이 천국의 시작을 가져왔다. 우리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