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찬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심현찬 목사.

이 글은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이 시대에 순전한 복음이 회복되기 위해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이 절실하다고 촉구하는 심현찬 목사(워싱턴 트리니티 연구원 원장)의 글이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이 글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한국 교회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왜 오늘의 한국 교회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영성이 절실한가?”

요즘의 신문 지상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 교회의 ‘돈, 섹스, 권력’ 에 대한 삼중의 탐욕을 연일 보게된다. 자칭 보수적인 기독 교단의 대표라고 자랑하는 한 단체의 금권 타락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절정으로, 그간 일부 교회들의 돈과 섹스와 권력에 대한 연쇄 사건을 보게된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한 때, 한국 사회의 양심이요 등불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와 일제치하 때엔, 이런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다. 요즘도 모범적으로 교회 후임자 선정을 보여준 존경받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있다. 묵묵하게 한국 교회와 교계, 나아가 한국과 세계를 위해 건강한 목회, 세상에 소망과 영향력을 주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물탄 복음이 아닌, 순전한 기독교와 복음을 위해, 눈물의 목회 현장에 계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일제와 한국 전쟁, 군사정권 등의 굴곡지고 소용돌이의 현대사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놀랄만한 교회의 성장과 선교사 파견들을 자랑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 사회의 양심있던 교회의 변질한 것을 생각할 때, 어떤 이는 말하길, 그래도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보다는 덜 하다고 스스로 위로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 자체도 교회 못지 않게 또다른 탐욕의 반지의 마법에 붙들려, 죽음의 길이요, 죽음의 병에 이른 줄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무소의 뿔처럼’ ‘용기있게’ 간다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보면 수긍이 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탕류를 빙자해서 결코 교회의 탕류에 대해 자위해서만은 안될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한편으론, 같은 그리스도인이요 목회자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매우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수동적인 비난과 비탄을 넘어서, 과연 이런 삼중의 탐욕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해 봐야할 것을 느낀다. 물론 한국 교회가 이런 삼중적 탐욕의 반지를 포기하는 길의 시작은, 일부에서 주장하고 행하는 철저한 회개일 수도 있다. 또한 특정 단체에서의 탈퇴나 그 해체 운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 조차도,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운동조차도 한국 교회의 악순환이요 병폐 중의 하나인 일회적이고 쇼맨쉽적인 캠페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먼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진지한 진단이 급선무요, 나아가서 일방적인 매도나 비난을 넘어서, 과연 이러한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앞으로 지적할 ‘골럼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서, 한국 교계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런 한국 교회의 총체적 위기 상황 앞에서, 어떻게 균형있는 사고, 관점, 해결의 과정을 모색하는데 조그만 징검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뿐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에 대한 진단과 대안의 모색을 위해서, 이 글은 세 부분으로 전개된다. 첫째, 한국교회는 과연 탐욕의 화신인 현대판 골럼인가라는 내용으로, 과연 골럼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한국 교회와 골럼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둘째로, 현대판 골럼과 같은, 한국 교회가 붙들린, 삼중적 탐욕의 반지와, 그로 인한 현대 한국 교회의 골럼 현상에 대한 진단을 해본다. 셋째이자 마지막으로, 과연 이런 탐욕의 반지의 마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본다. 무엇보다도 그 대안으로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인, 균형과 실천적인 영성을 생각해보고,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성으로의 회복에 대해서 개진하고자 한다.

1. 오늘의 한국 교회는 ‘현대판 골럼인가’?: 한국 교회와 골럼과의 관계

나는 이런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국 교회의 ‘삼중적인 탐욕의 반지’를 볼 때, 혹시 우리 한국 교회가 영국의 작가, J.R.R. 톨키언의 소설이자 영화화된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탐욕의 화신 골럼은 아닌가?하고 씁쓸한 질문을 해본다.

골럼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골럼은 누구인가? 영화 [반지의 제왕-3]인 [왕의 귀환]은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떻게 이 탐욕의 반지의 마법에서 과연 벗어나는가하는, 문학 용어로, 전형적인 ‘추구’ (Quest)의 플롯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인생은 영적인 전쟁’나아가 ‘구속적 여행’임을 보여주는 명화 중의 명화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탐욕의 화신인 골럼의 존재이다. 그는 스미골이란 이름이었지만, 친구가 우연히 발견한 반지에 대한 탐욕으로, 친구를 살인하고 그것을 차지한다. 이 반지는 악인의 화신인 사우론이 바로 인간을 탐욕과 파멸로 인도하는 파괴적인 도구이다. 이 스미골은 결국 이 반지에 대한 욕망을 점철되고 이젠 인간이 아닌 동물적인 골럼이 되어간다.

이 골럼의 탐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이 영화의 절정인 마지막 장면이다. 반지를 불못에 던져야만 사우론의 악의 세력이 멸망하기 때문에, 충성스런 동역자 샘의 도움으로 후로도는 반지를 운반하고 불연못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 불연못 앞에서 탐욕의 화신인 골럼이 나타나고 이 반지를 빼앗는다. 바로 여기서, 영화 감독인 잭슨과, 이 영화가 오히려 문학 작품보다도 더 탁월한 이유는, 골럼에 대한 그의 죽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반지를 빼앗는 과정에서 골럼은 결국 불연못으로 떨어져간다. 바로 이 때, 영화의 카메라에 클로즈업된 골럼의 모습을 주목해보라. 그는 그 탐욕의 반지를 소유한 것 자체로만으로 황홀해 한다.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그 감격 때문에 가장 행복해 한다. 심지어 불연못으로 떨어져서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초월한 양, 황홀한 표정으로 불연못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그는 탐욕의 반지에 붙들려서 평생을 동물적인 삶을 살았던, 무엇보다도 죽음의 순간 조차도 반지에 대한 탐욕에 붙들려 황홀해 한다. 한마디로, 골럼은 탐욕의 화신이다. 탐욕의 반지에 대한 집착으로, 친구를 죽이고, 동물적인 인생을 살고, 거짓으로 점철된 인생, 그리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이 골럼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하고 자문해본다. 다음에 간략히 지적할 한국 교회의 삼중의 탐욕에 대한 모습은, 바로 탐욕의 반지를 향한 골럼의 욕망의 생애와 같아보인다. 이 삼중의 반지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고, 한국 교회와 성도, 나아가 한국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장례의 행렬인지를 모르는 듯하다.우리 한국 교회는 이 장례식장에서도 아직도 춤을 추고 황홀해하는 골럼은 아닌가? 돈과 섹스와 권력의 탐욕의 반지에 붙들려 아직도 동물적이고 괴물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괴물인지조차도 망각한 듯하다. 슬프게도, 너무도 슬프게도 정말로 골럼과 너무도 똑같지 않는가! <계속> www.TrinityD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