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으로 단절된 하늘

예수께서 버림받은 증거는 구약의 양과 염소의 상징 외에도 실제의 사건으로 증명된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분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현대 시각으로 정오에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늘은 구름에 뒤덮였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심을 외친 것은 그렇게 태양이 빛을 잃은 후의 일이다.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에서 버려진, 이중의 버려짐의 상징인 것이다.

에덴 바깥, 예루살렘의 바깥

이 버려짐은 최초의 인간이 아담과 이브가 죄를 인해서 안전과 복락의 상징인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의 상황을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 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음으로 평화와 안정의 상징이 된 예루살렘성의 밖으로 내어 쫓기고 그 성밖에서 죄를 인하여 죽는 것이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에서 버려져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도 12시 정오가 되자 하늘에 어두움이 임한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 천국과 죄로 죽어가는 지상의 분리를 뜻하는 것으로 천국에서 버림받는 예수님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 부터 버려진 것을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이다.

이것은 첫 인류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낙원에 살 수 없게 된 것을 상징한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그 광야를 개척하면서 노동 속에서 죽었다. 반면 둘째 아담, 새 아담인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에서 버려진 채 죽었다. 만약 예수가 아담처럼 버려진 채 죽기만 하였다면 예수의 후예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의 후예들에게 죄로 죽고 의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천국 바깥

죄인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12시에 어둠이 임함으로 천국의 거룩과 지상의 죄를 분리하고 단절하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십자가의 죽음은 처절하게 그 천국과 지상의 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음으로, 버려짐의 문제가 해결된다.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과 지상이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는 새 인류가 되어 아담이 잃었던 의를 회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됨을 축복으로 받으면서 새 천국인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는 이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버려짐을 이해하여야 이 말씀의 암호가 풀린다. 이 버려짐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알아야 암호가 풀릴 수 있다. 여기에서 생각하여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이미 언급한 십자가상에서의 모습들, 즉 죄인들의 용서와 행악자의 구원과 인류의 새 관계 정립은 매우 멋지고 위대한 메시아의 모습이다. 그러나 버림받음에 대한 절규는 그런 메시아적 위대함에 매우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심오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된 것이다.

예수님 능력의 비밀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은 물론 예수님이 신적인 권세가 있으시기에 하시기도 하였지만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38).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과 함께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체적 신적 능력을 약화시키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서로에게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함께 일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차원이다. 성령님과의 관계는 그의 육체적 출생과 사역의 전반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었고(누가복음 3:22),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 시험을 받으러 가신다(누가복음 4:1). 시험 후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누가복음 4:14) 가셨고, 그곳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심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선포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누가복음 4:18)라고 능력이 성령님의 임재와 연관됨을 말씀하신다.

이뿐 아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주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태복음 12:18). 또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 주신 후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순종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으로 함께하심으로 권세 있게 하셨다. 그리고 많은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고치시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다고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 스스로 신적인 능력이 있으셔서 혼자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으시지만, 늘 하나님과 성령과의 교통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능력을 행하셨다는 말이다.

혼자였던 십자가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는 차원에서는 달랐다.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죽음에 처한 입장에서는 순전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을 때에도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한복음 16: 32).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잡혀갈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을 때 그는 혼자셨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 버려짐에 대한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이 죽음을 앞두고 감정적으로 두려워하고 한탄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두려움과 고통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더 중요한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아버지와의 분리이고 두번째는 제자들과의 분리였다. 그 분리는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아버지와의 분리를 통한 영적인 죽음과 제자들과의 분리를 통한 관계의 죽음과 실제 생명을 벗는 육체적 죽음을 포함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모든 풍요와 권세와 생명의 죽음의 상징이다.

우선은 이 모든 단절과 죽음을 거치셔야 했다.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져야 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분리는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시던 아들 예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또한 제자들을 남겨 놓고 가야 하는 심정은 어린 아기를 남겨 놓고 떠나는 부모의 심정이었다.

검은 구름의 비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일까?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동안, 그 차원에서 하나님은 처절하게, 가슴 아프게 예수님을 버리신다. 죽음으로 드려지는 유월절 어린양과 죽음으로 버려지는 아사셀 염소를 통하여 본 바와 같이,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와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서 상징적으로 쫓김을 받고 성밖으로 버려지신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벗어나, 구름으로 천국과 단절되시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전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버리시고, 이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유대와 로마인들에게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죽음당했을 뿐 아니라, 죽으신 후에는 자원하여 지옥에 가시어 복음을 전하신다. 그럼으로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도 하나님의 반전이 또 있다. 구름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늘과 땅의 분리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의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9장 34-35절은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늘로 돌아갈 때 구름이 덮인다. 제자들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으로 구름은 인간의 눈으로는 하늘과 땅의 분리이고,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그 구름 속에서 역사하신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내산에도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강림하신다(출애굽기 34:5).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지고 버림받아 죽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서 자신을 숨기시고, 예수님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섣부른 구원을 하시기보다는 독생자 아들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함께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숨겨진 장엄한 마음과 임재를 알지 못한다면 이 암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버려짐의 말씀은 상반되는 것일까? <다음 주 계속>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 북 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