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격하게 싸웠던 상대는 또래들 사이에서 이른바 ‘짱’으로 통하던 처키란 아이였다. 그것이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밝은 오렌지 색 머리칼과 주근깨, 그리고 커다란 귀가 공포영화 <처키>의 주인공과 닮았다고 해서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진심으로 두려워했던 인물도 처키였다. 그래서 처키가 날 때려눕히겠다고 덤벼들었을 때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온갖 두려움을 느끼고 처리하며 살게 마련이다. 넬슨 만델라는 진정한 용사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곧 극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곰곰이 되짚어 보면 두려움만한 선물도 없다. 불이나 실패, 무서운 짐승 따위를 겁내는 원초적인 공포심이야말로 인간에게 내장된 중요한 생존 수단이다. 그렇다고 겁이 너무 많은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실패하거나, 실망하거나,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과감히 맞서기보다는 무릎을 꿇고 지레 항복하고 만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나 공포를 화재경보기쯤으로 여기라. 더럭 겁이 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정말 위험요소가 있는지, 아니면 잘못 작동한 것인지 파악하라. 문제가 될 만한 점이 없다면 마음에서 털어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골목대장 처키와의 대결은 내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와 맞붙어 싸웠던 건 어린 시절을 통틀어 그때가 유일했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모든 아이들과, 심지어 제법 거친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하지만 처키는 달랐다. 마치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며 괴롭힐 상대를 찾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날보고 겁을 먹을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겨우 일 학년짜리 코흘리개인 데다가, 몸무게도 10킬로그램 남짓에 휠체어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지 않은가. 반면 처키는 나이도 곱절이나 많았고 몸짓도 나에 비하면 거인에 가까웠다. “넌 죽었다 깨나도 나한테 못 덤빌 것?” 어느 날 아침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이 말했다. 친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들겼다. ‘난 휠체어에 앉은 신세고 저 녀석은 나보다 두 배나 크네. 이거 분위기가 좋지 않군.’ “한번 해보자는 거야?”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까닭에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폭력은 절대로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겁쟁이가 될 수도 없었다. 어려서는 동생들이나 사촌들과 레슬링을 하면서 놀곤 했다. 남동생은 아직도 기술이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른다. 키와 체구가 나보다 커지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바닥에 쓰러뜨려 뺨으로 팔을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가끔 그때를 돌아보며 얘기한다. “얼굴로 짓누르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뼈가 부러질 것 같았어. 내가 형보다 몸집이 커진 뒤에야 이마를 밀어서 다가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지.” 처키와 맞설 때에도 그것이 문제였다. 싸움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녀석을 때려 눕혀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TV나 영화를 보면 대부분 주먹을 날리거나 발로 걷어차며 싸운다. 그러나 나는 팔다리 없이 싸워야 한다. 상대가 그런 점을 봐줄 인물도 아니다. 벌써 처키와 싸운다는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져 있었다. 다들 내가 상대를 어떻게 누르려는지 궁금해 했다. 뾰족한 수가 없는 나는 처키의 주먹 한방에 나가 떨어져 정신을 잃는 장면이 계속 어른 거렸다.

드디어 공포의 시간이 다가왔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는 휠체어를 밀고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전교생의 절반은 모인 것 같았다. 아예 도시락을 들고 나온 아이들도 있었고 내기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일단 휠체어에서 내려. 너만 전동 휠체어를 타고 싸우는 건 불공평해.” 녀석이 말했다. “좋아, 내리겠어. 하지만 너도 무릎을 꿇어야 돼.”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상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고 나도 휠체어에서 내렸다. 처키와 맞서서 원을 기리며 돌기 시작했다. 난 상대가 싸움을 포기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팔다리 없는 꼬마를 두들겨 패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같은 반 여자애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녀석은 나를 정말 해치려 달려들었다. 나는 마치 감자자루가 쓰러지듯 콘크리트 바닥에 자빠졌다. 몸을 일으켜 다시 덤벼들었지만 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상대는 나를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눈앞이 노래지며 의식이 가물거렸다.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린 내 눈에 처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왼발로 땅을 박차고 인간 미사일처럼 날아 이마로 상대의 콧등을 강타했다.

쓰러지는 녀석 위로 내 몸도 떨어져 뒹굴었다. 놈은 쓰러져 코를 감싸 쥔 채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구경꾼들의 절반은 환호성을 질렀고 절반은 몹시 당황해 했다. 코피가 철철 나는 코를 막고 화장실로 사라진 처키를 그 뒤로는 학교에서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팔다리가 없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장애가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려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허약하게 만들어 은혜와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 마음에 소원하는 목표와 이상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두려움이 평범한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장면을 수없이 지켜봤다. 하지만 두려움은 그저 느낌일 뿐 현실은 아니다. 두려움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은 집안에 들이지 않으면 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냉정히 외면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그만이다. 처키에게 얻어맞는 게 겁은 났지만 결국 그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때 나는 담대해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용감하게 행동하면 용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