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난 꼬마가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길을 달린다. 태양이 눈부신 대낮. 달리던 꼬마는 굴렁쇠를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우는지, 무엇이 이토록 슬픈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꼬마는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됐다. 평생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온 인생. 그가 세례를 받는다. 눈물이 흘렀다. 문득 어릴 적 굴렁쇠를 굴리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때 왜 울었는지.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 흘린 눈물에서 그는 답을 찾았다.
이어령 박사가 11일 오후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여해포럼 강연자로 나섰다. 이날 포럼 주제는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 Beyond). 대화문화아케데미(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고(故) 여해 강원용 목사와 오랜 세월 활동해온 이 박사가 고인과의 추억을 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고인과의 추억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영성을 말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이 곧 여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다소 도전적인 이 말부터 꺼냈다. 불과 3년 전 회심한 그가 그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이 땅의 교회에 쓴소리를 한다. 오만함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확신 때문인가.
“달라고만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외로우실 것 같다”
“세상엔 대통령도 있고 여당도, 야당도 있다. 기업도 있으며 언론도 있다. 왜 교회가 그런 곳엘 가는가. 무엇을 하려고.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곳이 아니다. 왜 문둥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그런 예수님만 보는가. 왜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신,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셨던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가. 왜 교회는 말씀으로 빵을 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박사를 가리켜 시대의 ‘지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이날 ‘지성의 한계’를 역설했다.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별들의 무덤을 예언했던 지성 중의 지성, 만물의 이치를 단 하나의 공식 안에 가둘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도 ‘죽음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저 ‘내가 좋아하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이 박사의 목소리가 더욱 격앙됐다.
“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흘렸다. 이제껏 그 누구 앞에서도 운 적이 없었는데……. 인간의 나약함, 끝없이 지성을 탐구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나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였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 분이 보였다.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다 주저앉아 울었던 나 자신도 보였다. 그 땐 왜 우는지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고 교회조차 그런 그에게 세상을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왜 내게 세상의 것들을 묻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서 찾으면 될 것을. 왜 영성에 대해 묻지 않는가” 지성의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그는 여전히 지성을 갈구하며 영성을 놓치는 이 시대가, 무엇보다 오늘의 교회가 안타까운 듯했다.
이 박사는 이날 많은 것들을 토해냈다. 비록 인생의 끝에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신앙의 진지함을 선물한 것 같았다. 음미할만한 그의 말을 덧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한다. 혹 하나님께 나의 이것을 드리겠다 저것을 드리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하냐 묻는 이가 있을까? 하나님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백, 수천 개로 쪼개질 것이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겐 이런 의의 하나님, 또 저 사람에겐 저런 의의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사랑은 동일하다. 오늘 주제가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인데 서로 다른 양극을 뛰어 넘는 것은 사랑과 생명 뿐이다.”
시간이 흘러 꼬마는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됐다. 평생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온 인생. 그가 세례를 받는다. 눈물이 흘렀다. 문득 어릴 적 굴렁쇠를 굴리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때 왜 울었는지.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 흘린 눈물에서 그는 답을 찾았다.
이어령 박사가 11일 오후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여해포럼 강연자로 나섰다. 이날 포럼 주제는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 Beyond). 대화문화아케데미(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고(故) 여해 강원용 목사와 오랜 세월 활동해온 이 박사가 고인과의 추억을 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고인과의 추억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영성을 말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이 곧 여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다소 도전적인 이 말부터 꺼냈다. 불과 3년 전 회심한 그가 그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이 땅의 교회에 쓴소리를 한다. 오만함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확신 때문인가.
“달라고만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외로우실 것 같다”
“세상엔 대통령도 있고 여당도, 야당도 있다. 기업도 있으며 언론도 있다. 왜 교회가 그런 곳엘 가는가. 무엇을 하려고.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곳이 아니다. 왜 문둥병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그런 예수님만 보는가. 왜 돌들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신, 빵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셨던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가. 왜 교회는 말씀으로 빵을 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박사를 가리켜 시대의 ‘지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이날 ‘지성의 한계’를 역설했다.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별들의 무덤을 예언했던 지성 중의 지성, 만물의 이치를 단 하나의 공식 안에 가둘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도 ‘죽음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저 ‘내가 좋아하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이 박사의 목소리가 더욱 격앙됐다.
“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흘렸다. 이제껏 그 누구 앞에서도 운 적이 없었는데……. 인간의 나약함, 끝없이 지성을 탐구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나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였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 분이 보였다.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다 주저앉아 울었던 나 자신도 보였다. 그 땐 왜 우는지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고 교회조차 그런 그에게 세상을 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왜 내게 세상의 것들을 묻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서 찾으면 될 것을. 왜 영성에 대해 묻지 않는가” 지성의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그는 여전히 지성을 갈구하며 영성을 놓치는 이 시대가, 무엇보다 오늘의 교회가 안타까운 듯했다.
이 박사는 이날 많은 것들을 토해냈다. 비록 인생의 끝에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신앙의 진지함을 선물한 것 같았다. 음미할만한 그의 말을 덧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한다. 혹 하나님께 나의 이것을 드리겠다 저것을 드리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하냐 묻는 이가 있을까? 하나님이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백, 수천 개로 쪼개질 것이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겐 이런 의의 하나님, 또 저 사람에겐 저런 의의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사랑은 동일하다. 오늘 주제가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인데 서로 다른 양극을 뛰어 넘는 것은 사랑과 생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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