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짤막하게 기도한 후, 펜을 들었지만 출발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고는 있지만 문장으로 나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심적인 부담감이 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간증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정리해야 할 인생 54살에 예수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더러운 때와 허물이 쌓였겠는가? 뉴턴의 만유인력설, 다윈의 진화론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직분자들의 왜곡된 행실들, 통일교, 감람나무 등 각종 이단들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이 나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아내가 열심히 다니던 남쪽 큰 교회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목사님의 구령에 힘차고 복창하며 쉽게 구원을 따놓고 종교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서슴없이 쓰며 지냈다. 그러나 이후에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 많은 갈등을 겪게 됐다.
1974년 9월 주재원으로 시카고에서 시작한 이민생활. 당시 시카고 교민은 2만명 정도였고 사업은 주로 가발업이었다. 나는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뒤로 하고 최하위 직업순위인 신발 수선을 택했고 자금이 형성되자 지인의 권유로 1987년 최초의 교포은행을 설립했다. 그 당시 나는 재정적으로 자리가 잡힌 상태였고 4-5년 후면 주식 이익이 분배될 것을 꿈꾸며 나름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나는 크고 작은 사업을 하면서 순탄하게 지내온지라 그 은행이 잘못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고 혹 잘못된다 해도 당시 120석의 미국 식당, 렌트만 받는 빌딩이 3곳, 성업 중인 신발가게 여러 곳 덕에 너무나도 자신이 넘치는 삶이었다. 이제 고생은 많이 했으니 여생은 골프나 치면서 여행이나 다니고 좋은 음악이나 들으며 인생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은행이 문을 연 후, 2-3년이 지나며 어려움이 시작됐다. 모태부터 어머니 신앙의 영향을 받아 온 아내는 “물질이 영혼 구원에 걸림돌이 된다면 물질을 가져 가시더라도 남편을 구원해 주시길” 기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주위 동료들도 나의 영혼 구원을 놓고 끈기있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삶의 모습에 아내의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아내는 유대인 변호사에게 이혼 수속을 밟게 됐다. 그러나 교회 부흥회에서 “너는 완전하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크리스천이 됐다. 남편이 속 썩인 덕분에 아내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5년 8개월만에 교포를 위한 교포은행은 문을 닫았고 잃어 버린 물질보다 바닥으로 떨어진 마음의 상처가 더 괴로웠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도서관에서 생활하는 것이 전부이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의 권유로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됐고 양성연 목사님의 6개월간의 지도는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으며 신앙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1993년 10월 20일 양 목사님은 개척교회 부흥성회에 워싱턴DC에 계신 김원기 목사님을 강사로 모셨다. 첫시간 말씀은 누가복음 5장 5절 말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높아지고 있었다. 1974년에 이민와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던 내가 지금 거의 모두를 잃어 버리고 잡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은둔하고 있는데 남의 약점을 주제로 부흥회를 하는 경우가 도대체 무엇인가? 1년이 지나며 조금씩 아물어져 가는 은행에 대한 상처를 건드리는 법이 어디 있는가? 심한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양 목사님이 강사님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준 게 아닌가 오해를 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며 설교의 주인공은 베드로가 아니고 나 자신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열심히 경청하면서 부흥회는 마지막 날이 됐다. 목사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신 분 중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을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도 이미 얼과 혼이 빠진 사람처럼 일어나 그 사람들 속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평소 박수치고 손들고 울고 불고 하는 사람들은 감성만 발달한,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지적인 면이 약해서 저런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사람들 속에 어울려 있지 않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내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앉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했다. “남자가 체신없이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양 어금니에 힘주며 참으려 노력했지만 힘을 주면 줄 수록 나는 더욱 심하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계속 울면서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울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점잖고 근엄한 나의 모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한없는 흐느낌 속에 부흥회는 끝이 났다.
그날 오전 10시경, 평상시처럼 나는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운전하며 그간 배운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아침에도 울었는데 지금 또 왜 눈물이 흐르나? 운전하며 밖을 쳐다 보니 모든 물체가 엷은 갈색으로 보였다. 내가 울어서인가 하고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고 밖을 쳐다 보니 이제는 상가도, 걸어가는 사람도 모두 상하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날 이후 일생 보지 못했던 성경이 이해가 되고 재미있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마음이 기쁘고 성경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성경말씀처럼 “송이꿀처럼 달다”는 말씀이 실감이 났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양육하기 시작하셨음을 한참 후에 알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 주신 것도 알게 됐다. 다 잃어 버리고 인생이 비참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나는 부흥집회 후 양 목사님을 찾아 뵙고 부흥회 때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7권의 책을 권하셨다. 조지 뮬러, 스펄전, 무디, 리차드 허드슨 등. 모두 열심히 정독하고 그분들의 일생 경험을 나는 짧은 시간의 간접 경험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너무 흥분되고 숨막히는 순간들이었다. 큰 보화를 찾았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100-150독 했고 하루에 기도를 1-3시간 한다는 점이었다. 영이신 하나님과 친숙해 질 수 있는 두가지 비밀이었다.
1993년 11월 1일, 늦었지만 나는 신앙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나를 돌보아 주시던 양 목사님은 워싱턴으로 떠나셨고 나는 그 이후 17년의 시간을 성령님께 의지하며 그 도우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독일보는 각 교회 성도들의 은혜로운 간증을 모집합니다. 간증은 chicagodaily@gmail.com이나 PO Box 6370 Evanston, IL60204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간증에는 본인의 연락처를 반드시 기재하셔야 합니다.
서서히 정리해야 할 인생 54살에 예수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더러운 때와 허물이 쌓였겠는가? 뉴턴의 만유인력설, 다윈의 진화론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직분자들의 왜곡된 행실들, 통일교, 감람나무 등 각종 이단들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이 나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아내가 열심히 다니던 남쪽 큰 교회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목사님의 구령에 힘차고 복창하며 쉽게 구원을 따놓고 종교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서슴없이 쓰며 지냈다. 그러나 이후에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 많은 갈등을 겪게 됐다.
1974년 9월 주재원으로 시카고에서 시작한 이민생활. 당시 시카고 교민은 2만명 정도였고 사업은 주로 가발업이었다. 나는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뒤로 하고 최하위 직업순위인 신발 수선을 택했고 자금이 형성되자 지인의 권유로 1987년 최초의 교포은행을 설립했다. 그 당시 나는 재정적으로 자리가 잡힌 상태였고 4-5년 후면 주식 이익이 분배될 것을 꿈꾸며 나름 성공했다고 자부했다.
나는 크고 작은 사업을 하면서 순탄하게 지내온지라 그 은행이 잘못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고 혹 잘못된다 해도 당시 120석의 미국 식당, 렌트만 받는 빌딩이 3곳, 성업 중인 신발가게 여러 곳 덕에 너무나도 자신이 넘치는 삶이었다. 이제 고생은 많이 했으니 여생은 골프나 치면서 여행이나 다니고 좋은 음악이나 들으며 인생을 즐기리라 생각했다.
은행이 문을 연 후, 2-3년이 지나며 어려움이 시작됐다. 모태부터 어머니 신앙의 영향을 받아 온 아내는 “물질이 영혼 구원에 걸림돌이 된다면 물질을 가져 가시더라도 남편을 구원해 주시길” 기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주위 동료들도 나의 영혼 구원을 놓고 끈기있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삶의 모습에 아내의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아내는 유대인 변호사에게 이혼 수속을 밟게 됐다. 그러나 교회 부흥회에서 “너는 완전하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크리스천이 됐다. 남편이 속 썩인 덕분에 아내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5년 8개월만에 교포를 위한 교포은행은 문을 닫았고 잃어 버린 물질보다 바닥으로 떨어진 마음의 상처가 더 괴로웠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도서관에서 생활하는 것이 전부이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의 권유로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됐고 양성연 목사님의 6개월간의 지도는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으며 신앙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1993년 10월 20일 양 목사님은 개척교회 부흥성회에 워싱턴DC에 계신 김원기 목사님을 강사로 모셨다. 첫시간 말씀은 누가복음 5장 5절 말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높아지고 있었다. 1974년에 이민와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던 내가 지금 거의 모두를 잃어 버리고 잡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은둔하고 있는데 남의 약점을 주제로 부흥회를 하는 경우가 도대체 무엇인가? 1년이 지나며 조금씩 아물어져 가는 은행에 대한 상처를 건드리는 법이 어디 있는가? 심한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양 목사님이 강사님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준 게 아닌가 오해를 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며 설교의 주인공은 베드로가 아니고 나 자신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열심히 경청하면서 부흥회는 마지막 날이 됐다. 목사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신 분 중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을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도 이미 얼과 혼이 빠진 사람처럼 일어나 그 사람들 속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평소 박수치고 손들고 울고 불고 하는 사람들은 감성만 발달한,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지적인 면이 약해서 저런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사람들 속에 어울려 있지 않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내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앉는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했다. “남자가 체신없이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양 어금니에 힘주며 참으려 노력했지만 힘을 주면 줄 수록 나는 더욱 심하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계속 울면서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울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점잖고 근엄한 나의 모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한없는 흐느낌 속에 부흥회는 끝이 났다.
그날 오전 10시경, 평상시처럼 나는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운전하며 그간 배운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또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아침에도 울었는데 지금 또 왜 눈물이 흐르나? 운전하며 밖을 쳐다 보니 모든 물체가 엷은 갈색으로 보였다. 내가 울어서인가 하고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고 밖을 쳐다 보니 이제는 상가도, 걸어가는 사람도 모두 상하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날 이후 일생 보지 못했던 성경이 이해가 되고 재미있고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마음이 기쁘고 성경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성경말씀처럼 “송이꿀처럼 달다”는 말씀이 실감이 났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양육하기 시작하셨음을 한참 후에 알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 주신 것도 알게 됐다. 다 잃어 버리고 인생이 비참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나는 부흥집회 후 양 목사님을 찾아 뵙고 부흥회 때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7권의 책을 권하셨다. 조지 뮬러, 스펄전, 무디, 리차드 허드슨 등. 모두 열심히 정독하고 그분들의 일생 경험을 나는 짧은 시간의 간접 경험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너무 흥분되고 숨막히는 순간들이었다. 큰 보화를 찾았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100-150독 했고 하루에 기도를 1-3시간 한다는 점이었다. 영이신 하나님과 친숙해 질 수 있는 두가지 비밀이었다.
1993년 11월 1일, 늦었지만 나는 신앙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나를 돌보아 주시던 양 목사님은 워싱턴으로 떠나셨고 나는 그 이후 17년의 시간을 성령님께 의지하며 그 도우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독일보는 각 교회 성도들의 은혜로운 간증을 모집합니다. 간증은 chicagodaily@gmail.com이나 PO Box 6370 Evanston, IL60204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간증에는 본인의 연락처를 반드시 기재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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