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두번째 인터뷰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학교로 꼽히는 시카고신학교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 중인 이상철 목사다. 이 목사는 한국 진보신학의 산실인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Th.M. 학위를 받았다. 맥코믹신학교로 유학와 MATS 과정을 마친 후, 시카고신학교에서 Ph.D. 과정 중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명지대학교에서 3년간 시간강사로 <성서 입문>, <기독교와 문화>를 강의했다. 현재는 시카고신학교 내에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CSKC)의 간사이면서 레익뷰한인장로교회 청년담당 목사로 4년 반째 사역 중이다. 한국의 대표적 민중신학 연구소인 ‘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회원이고, 이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한편, 이 목사의 아버지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인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이동준 목사이기도 하다.
-기독교 윤리학의 학문적 정의부터 듣고 싶습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하기 전에 윤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서양의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선’이 무엇인지 물어왔습니다. 선은 좋음에 대한 규명이었으며, 도덕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행복에 대한 추구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스토아 학파, 에피쿠르스 학파, 어거스틴,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 그리고 미국의 실용주의로 이어지는 윤리학의 거대한 축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음을 추구하는 윤리학은, 칸트적 측면에서 볼 때, 엄격한 의미에서 한번도 순수한 의미의 도덕(morality)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전 시대의 윤리적 잣대에 의하면, 나에게 ‘좋은 것(쾌)’은 ‘선’이고 나에게 ‘불편한 것(불쾌)’은 ‘악’이었습니다. 칸트는 막연한 의미의 좋음이 아니라, ‘도덕적 강제(정언명법)’의 본질적 의미로서 ‘선’을 물었다는 측면에서 순수 윤리학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 이후 진보진영 기독교 윤리학은 ‘선 의지’, ‘정언명법’ 등 칸트 윤리학의 중심 이슈들을 기독교적 언어로 전환하여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 땅 위에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 의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주제라면,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는 구체적인 행동 원칙으로서의 정언명법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행동 원칙들을 예언서에서 찾아내, 정의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원칙들을 새롭게 제시한 점,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난 기사들과 초대 교회를 서술한 바울서신 등을 토대로 아가페 윤리, 종말론적 윤리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윤리의 지경은 확대되어 왔습니다. 성서윤리에 나타난 각론적 기독교 윤리의 주제들은 본 회퍼, 리처드 니버, 월터 뮬러를 거치며 ‘책임윤리’로 한 데에 묶어졌고, 이는 라인홀드 니버에 의해 ‘기독교 현실주의’란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세계는 대대적인 변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나 전 시대의 지배질서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를 통해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21세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학문적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담론의 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반전운동, 히피들의 등장 등 변혁을 갈망하는 몸부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죠. 기독교 윤리학 흐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조셉 플레쳐의 <상황윤리>(1966)가 나온 시기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기존의 규범이나 법칙은 상황에 따라 제고될 수 있다는 상황윤리의 제안은 확실한 ‘선 의지’를 전제로 했던 기독교 윤리학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개인에게 주목하는 상황 윤리는, 예를 들어,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불법 체류자와 미국의 이민정책 등 법과 제도라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속박당하는 개인의 구체적 상황이 윤리적 관심사입니다. 그 동안의 윤리가 개개인의 상황은 무시한 채 궁극적 선의 추구에만 몰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반성을 하게 하는 대목이지요.
요즘 기독교 윤리학의 최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타자성의 윤리, 다름의 윤리, 차이의 윤리 등은 상황윤리에 대한 전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법과 제도, 시스템이 지닌 절대성 아래에서 벌어지는 오류와 폭력에 대해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성(Totality)’이라 비난하면서 ‘타인의 얼굴(Face of the Other)’을 이야기하고, 데리다는 전체성 밖으로 추방당한 타자들에 대한 ‘환대(Hospitality)’를 주장합니다. 어쩌면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닐지 모릅니다. ‘악’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절대’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것이 종교적 절대성이든, 이념적 절대성이든, 인종적 절대성이든, 계급적, 지역적 절대성이든 말이지요. 이러한 다름에서 오는 차이와 다양성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환대할 수 있을까? 현대 기독교 윤리학은 이를 ‘타자성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상황윤리는 보편적 선을 부정하는 윤리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궁극적 선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기독교적 기초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가요?
상황윤리는 보편적 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과 규범이 상황에 따라 전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선언은 신 존재에 대한 논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양태에 대한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이슈가 되어 왔는데, 20세기 최대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폴 틸리히는 “궁극적 실재의 존재방식이 다차원적으로 존재한다”고 말을 하였고, 화이트헤드는 신을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살피시는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그 신은 또한 우리의 아픔과 현실적 고통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그 고난의 연대를 통해 신의 신됨을 증명하고 완성해 간다는 새로운 신론은 전통 신학이 지녔던 정태론적인 신개념을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있습니다. 상황윤리는 이러한 새로운 신론에 맞는 새로운 윤리적 이론이라 할 수 있겠죠.
-새로운 기독교 윤리학인 타자의 윤리학이 지향하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2차 대전 전범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다는 혐의를 진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이 남미에서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던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목격담과 생각을 엮어서 출판한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본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라는 말로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합니다.
나치 정권하의 독일 사람들은 칸트의 후예답게 의무론적 윤리에 충실했고, 의무론적 윤리의 최정점에 있는 선의지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불행이라면 그 집단의 정점에 히틀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선의지가 교묘하게 히틀러로 치환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치는 그 음모를 대중들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분절화 시켰고, 분절된 개인들을 전체의 틀에 가두어 전체(선의지)와 개인(도덕적 주체)간의 네트웍에만 몰두하게끔 유도하였습니다. 반면, 분절된 개인과 개인끼리의 소통은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하나 살펴보면 나름 선량한 시민들이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일에 주저함이 없이 동원되도록 길들여졌던 것이죠. 그 대표적 표본이 아이히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치가 자기에게 부과한 일만 숙지했지, 그 집단의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치는 선 그 자체였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하여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집단의 명령이 유대인(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못한 채, 오로지 나치의 명을 따랐던 것입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라 명명하였는데, 결국, 아렌트에게 있어 사유란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레비나스)이고,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칸트)는 명령이며, 타자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 인해서 발생한 악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취향과 전문화의 정도가 심한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분야(혹은 취향) 이외에서 일어나는 증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편화된 개인을 움직이는 현재의 유일한 원리는 오직 자본의 법칙 뿐이죠.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뜨거웠던 이념들은 모두 자본 안으로 흡수된지 오래고, 대통령을 뽑을 때도, 대학 총장을 뽑을 때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모두 자본의 법칙에 순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제1 관심사입니다. 나머지 평가 항목의 총량을 다 합하여도 자본의 원칙 한 종목을 넘지 못합니다. 나치가 독일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통용되었던 국가적 의지의 극대화였다면,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자본은 바야흐로 21세기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세계 시민의 의지이자 숭고함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의 명령 앞에,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명령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철저히 무사유한 상태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됩니다.
다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타자의 윤리학이라 지칭되는 새로운 기독교 윤리학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자본의 논리 속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타자의 신음소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거대한 악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이 신자본주의 질서를 악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악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깨우고 부추긴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드’와 우리의 ‘에고’의 가치를 존중하는 신자유주의의 달콤한 유혹 앞에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 등 모든 관계들이 시장판의 논리로 변했다는 점입니다. 이렇듯 자본의 법칙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 내지는 암세포와 같은 생존법칙을 지닙니다.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은 무한질주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2등이 기억되지 않는 1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광란의 질주에서는 나 이외 다른 타인은 배려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제거의 대상, 내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죠. 이 모든 원인이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안에 깃들어 있는 악의 메커니즘과 전체성을 폭로하는 일, 그리하여 자본의 가치와 대립되는, 하나 하나가 지닌 생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 그것을 향한 연대와 화합을 꾀하는 것이 타자윤리학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 교회의 모습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현대교회는 너무나도 친 자본주의적입니다. 부흥한다는 교회의 시스템은 경영논리와 경영적 마인드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경향은 심화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신학 이외에 MBA 공부를 하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유를 물으면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기업 운영을 잘하려는 경영자로 비쳐집니다. 조엘 오스틴이나 윌로크릭교회 같은 성공 스토리가 미화되고 칭송되고 있는 세대입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고난, 십자가,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보다는 개교회 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승리와 번영, 성공지향적인 말씀선포나 현실의 어려움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개그맨 같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환영 받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목회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질문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저는 현실 교회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적 목회현실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어와 비전을 갖고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시카고에 거주하며 몇 차례 윌로크릭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정서상 그곳으로 예배 드리러 간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나의 익명성이 보장되고 회중 자리에 앉아 있다가 쿨하게 예배 끝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옵니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나와 타자, 나와 신앙공동체 가운데 임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해방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 등은 모두 한 신앙 공동체로서 그 안에 많은 타자들을 포섭하면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익명성 속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것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교회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닌, 오직 ‘나’에게만 밀착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패턴은 이러한 측면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목사님이 가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올바른 교회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면, 보수적 목회자들은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를 가장 이상적 교회 모델로 보고 있습니다만.
초대교회의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섬겨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나의 필요보다도 더 갈급한 필요를 지닌 타자의 그것을 섬겨주는 공동체,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끈 안에서 가능했던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죠. 타자에 대한 섬김이 이루어 지기 전에 전제가 되어야 할 사항이 바로 타자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저 역시 초대교회를 가장 이상적 교회라 말합니다.
제가 꿈꾸는 차이와 다름, 그리고 섬김을 모토로 하는 21세기 초대교회 모습은 우선 교회 직제의 유연성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 1인 체제를 벗어나 각기 다른 달란트를 지닌 3명 정도의 목회자가 팀사역을 하면서 당회장도 돌아가면서 하고, 장로직도 일정기간 사역했으면 물러나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장로 구성의 성비에서도 의무적으로 50% 가까이 남녀 성비를 맞추어야 합니다. 당회 중심의 권위적 교회 운영보다는 위원회 중심의 사역 시스템으로 교인을 조직하여 그 위원회의 장은 평신도들이 하되 예산을 포함한 독립적인 운영권을 주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각 위원회 별로 고문의 형식으로 위촉이 되고 당회와의 연결도구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구조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그런 통로와 창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흐름이 회중들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다름을 무너뜨리고 막힘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의 의견이 수렴되고 발산되는 공동체, 그런 교회를 한번 꿈꿔 봅니다.
-좀더 현실의 문제로 돌아 와서 시카고 지역 한인교회의 각종 문제에 이 윤리적 잣대를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서두에서 서구윤리의 계보를 언급하면서 칸트 이전의 윤리적 특색이 ‘좋음’과 ‘싫음’, 이 두 축을 특색으로 하는 윤리학이라고 했었죠. ‘좋음’은 ‘선’이고 ‘싫음’은 ‘악’입니다. 좋음의 범주에 편입될 수 있는 것에는 익숙함, 친숙함, 같음 등이 포함되고, 싫음의 범주에는 다름, 낯섦, 불편함 등이 포함됩니다. 현재 시카고 교계 분쟁의 원인은 싫음과 악을 동일시 한다는 점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 내가 지지하는 목사님, 혹은 장로님을 비판하는 행위는 악입니다. 그것은 악이 아니라 다름일 뿐입니다. 다름은 대화와 공감과 설득과 양보와 합의의 대상이지 제거와 죽임과 저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카고 한인교회의 분쟁을 보면 안타깝게도 모두 이러한 현상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무척이나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 나에게 낯선 매체 내지는 의사소통의 방식, 나의 관성(관행)과는 다른 법칙 내지는 의견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정죄하고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악성 루머를 만들어 매도하는 패턴은 일반적으로 분쟁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주도층, 비판적 지식인들의 참여 등으로 인해 어느 정도 거품이 제거되고 대강의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시카고 교계는 예외적입니다. 왜 무엇이 시카고의 교회분쟁을 가속화, 저질화, 고립화 시키는가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기독교적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심각한 연구의 대상이라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카고 교계의 문제뿐 아니라 시카고 한인 이민 사회와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과 제휴하여 대대적인 조사와 연구를 전개할 필요를 느낍니다.
-시카고 한인 이민 교회가 확립해야 할 기독교 윤리의 현실적 과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몸의 어느 조직에서, 예를 들어 팔, 다리, 머리카락 등에서 세포를 떼어내 DNA 검사를 해도 모두 결과는 같습니다. 시카고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커뮤니티입니다. 이것이 시카고가 지니고 있는 지역적 DNA의 특징입니다. 시카고에 있는 한인교회 역시 시카고가 지닌 이러한 DNA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민 1세대 시카고 한인교회는 이러한 법칙과는 동떨어진 역사를 그려 왔습니다. 물론 시카고 이민 1세대 한인교회의 역사는 그것 자체로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분명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제 2세대 시카고 한인 이민교회의 역사를 위한 초석임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시카고 이민교회 제2기의 역사는 시카고가 지닌 이러한 다름의 컨텍스트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카고 한인들은 흑인 거주지역 혹은 라티노 거주지역에서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그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백인들과도 상대하지요. 요즘은 중국, 인도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의 종교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한국교회의 천편일률적인 직제와 예배와는 달리 미국교회는 각 교단별로 색채가 확연히 다릅니다. 흑인교회는 또 교단과 상관없이 독특한 흑인교회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인 이민교회는 시카고의 이러한 다양한 인종, 종교, 관습과의 소통과 관심, 열림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한인 2세 교회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시카고 한인교회에 2세들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 교회로 가든 아니면, 범아시아권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한인 2세들은 신앙생활을 접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한인교회에서 2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입니다. 이는 단순히 영어권 교역자에 대한 문제로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인 시카고의 지역적 DNA에 노출되어 성장한 한인 2세들에게 있어 현 한인 1세 교회의 구조는 너무나도 폐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의 70-80년대 문화를 그대로 이식해 온 보수적 교회 운영과 한국보다 더 답답한 가부장제에 입각한 교회문화가 청년들을, 한인 2세들을 세상 밖으로 내몰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진단일까요?
또 한인교회는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시카고의 지역적 DNA를 수용하기 이전에, 세대간 차이와 다름을 극복해야 하는 근본적 과제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2세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선물을 보내는 일회적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의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차이와 다름에 대한 무시와 명령, 진압과 배제의 차원이 아닌, 교회 내 구성체들끼리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실제 우리 교회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고민이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그 과제에 도전하는 한인교회만이 앞으로의 미래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목사님은 목회에서 다름의 윤리학, 타자성의 윤리학을 적용해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지금 레익뷰교회에서 한어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청년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시카고로 건너온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입니다. 저 역시 유학생인지라 그 사정을 잘 알지요. 저희 레익뷰 베냐민 청년부에서 2007년부터 매년 “F-1 유학생을 위한 바자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해 다른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자신들도 유학생인 주제에 자기들보다 어려운 유학생(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위해 모이고 열정을 쏟는 청년들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내부를 장식하고 초대장, 포스터를 만들어 배부하고 홍보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무척 힘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기쁘고 재미있게 협력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고, 만난 적도 없는 타자를 위한 열림이라는 그 자체가 저희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우리가 아는 사람도 아닌 타자를 환대하는 것을 실험해 본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누굴 정해서 주자 했으면 당장 싸움이 났을 겁니다. 타자를 환대하는 윤리, 타자를 위한 우리라는 이 감동이 큽니다. 아마 제가 성인 목회를 한다면 교회 구성체들과 함께 또 다른 적용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끝으로 기독교 윤리학의 사명에 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인류 역사에 발생했던 모든 분쟁과 다툼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타자에 대한 정복과 지배의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1차적 과제는 그 욕망의 죄악됨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욕망을 구동시키는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인터뷰에서 계속 지적했던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차이와 다름에 대한 환대와 열림이라는 단순한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구체적인 프락시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재무장까지가 기독교윤리의 전영역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이사야 11장에 이리와 어린 양이 뛰놀고, 아이와 독사가 함께 하는 그런 세상을 그리는 대목이 떠오르네요. 이리와 어린양, 아이와 독사는 서로 타협이 불가능한, 서로가 지닌 급격한 타자성으로 인해 조합이 불가능한 만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타자성이 다 화해되고 용인되고 무화되는 그런 곳을 상상합니다. ‘타자의 윤리학’이 꿈꾸는 곳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인터뷰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학교로 꼽히는 시카고신학교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 중인 이상철 목사다. 이 목사는 한국 진보신학의 산실인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Th.M. 학위를 받았다. 맥코믹신학교로 유학와 MATS 과정을 마친 후, 시카고신학교에서 Ph.D. 과정 중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명지대학교에서 3년간 시간강사로 <성서 입문>, <기독교와 문화>를 강의했다. 현재는 시카고신학교 내에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CSKC)의 간사이면서 레익뷰한인장로교회 청년담당 목사로 4년 반째 사역 중이다. 한국의 대표적 민중신학 연구소인 ‘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회원이고, 이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한편, 이 목사의 아버지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인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이동준 목사이기도 하다.
-기독교 윤리학의 학문적 정의부터 듣고 싶습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하기 전에 윤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서양의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선’이 무엇인지 물어왔습니다. 선은 좋음에 대한 규명이었으며, 도덕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행복에 대한 추구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스토아 학파, 에피쿠르스 학파, 어거스틴,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 그리고 미국의 실용주의로 이어지는 윤리학의 거대한 축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음을 추구하는 윤리학은, 칸트적 측면에서 볼 때, 엄격한 의미에서 한번도 순수한 의미의 도덕(morality)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전 시대의 윤리적 잣대에 의하면, 나에게 ‘좋은 것(쾌)’은 ‘선’이고 나에게 ‘불편한 것(불쾌)’은 ‘악’이었습니다. 칸트는 막연한 의미의 좋음이 아니라, ‘도덕적 강제(정언명법)’의 본질적 의미로서 ‘선’을 물었다는 측면에서 순수 윤리학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 이후 진보진영 기독교 윤리학은 ‘선 의지’, ‘정언명법’ 등 칸트 윤리학의 중심 이슈들을 기독교적 언어로 전환하여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 땅 위에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 의지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주제라면,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는 구체적인 행동 원칙으로서의 정언명법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행동 원칙들을 예언서에서 찾아내, 정의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원칙들을 새롭게 제시한 점,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난 기사들과 초대 교회를 서술한 바울서신 등을 토대로 아가페 윤리, 종말론적 윤리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윤리의 지경은 확대되어 왔습니다. 성서윤리에 나타난 각론적 기독교 윤리의 주제들은 본 회퍼, 리처드 니버, 월터 뮬러를 거치며 ‘책임윤리’로 한 데에 묶어졌고, 이는 라인홀드 니버에 의해 ‘기독교 현실주의’란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세계는 대대적인 변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나 전 시대의 지배질서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를 통해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21세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학문적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담론의 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반전운동, 히피들의 등장 등 변혁을 갈망하는 몸부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죠. 기독교 윤리학 흐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조셉 플레쳐의 <상황윤리>(1966)가 나온 시기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기존의 규범이나 법칙은 상황에 따라 제고될 수 있다는 상황윤리의 제안은 확실한 ‘선 의지’를 전제로 했던 기독교 윤리학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개인에게 주목하는 상황 윤리는, 예를 들어,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불법 체류자와 미국의 이민정책 등 법과 제도라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속박당하는 개인의 구체적 상황이 윤리적 관심사입니다. 그 동안의 윤리가 개개인의 상황은 무시한 채 궁극적 선의 추구에만 몰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반성을 하게 하는 대목이지요.
요즘 기독교 윤리학의 최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타자성의 윤리, 다름의 윤리, 차이의 윤리 등은 상황윤리에 대한 전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법과 제도, 시스템이 지닌 절대성 아래에서 벌어지는 오류와 폭력에 대해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성(Totality)’이라 비난하면서 ‘타인의 얼굴(Face of the Other)’을 이야기하고, 데리다는 전체성 밖으로 추방당한 타자들에 대한 ‘환대(Hospitality)’를 주장합니다. 어쩌면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닐지 모릅니다. ‘악’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절대’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것이 종교적 절대성이든, 이념적 절대성이든, 인종적 절대성이든, 계급적, 지역적 절대성이든 말이지요. 이러한 다름에서 오는 차이와 다양성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환대할 수 있을까? 현대 기독교 윤리학은 이를 ‘타자성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상황윤리는 보편적 선을 부정하는 윤리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궁극적 선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기독교적 기초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가요?
상황윤리는 보편적 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과 규범이 상황에 따라 전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선언은 신 존재에 대한 논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양태에 대한 물음은 어느 시대에나 이슈가 되어 왔는데, 20세기 최대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폴 틸리히는 “궁극적 실재의 존재방식이 다차원적으로 존재한다”고 말을 하였고, 화이트헤드는 신을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살피시는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그 신은 또한 우리의 아픔과 현실적 고통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그 고난의 연대를 통해 신의 신됨을 증명하고 완성해 간다는 새로운 신론은 전통 신학이 지녔던 정태론적인 신개념을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있습니다. 상황윤리는 이러한 새로운 신론에 맞는 새로운 윤리적 이론이라 할 수 있겠죠.
-새로운 기독교 윤리학인 타자의 윤리학이 지향하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2차 대전 전범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다는 혐의를 진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이 남미에서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던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목격담과 생각을 엮어서 출판한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본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라는 말로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합니다.
나치 정권하의 독일 사람들은 칸트의 후예답게 의무론적 윤리에 충실했고, 의무론적 윤리의 최정점에 있는 선의지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불행이라면 그 집단의 정점에 히틀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선의지가 교묘하게 히틀러로 치환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치는 그 음모를 대중들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분절화 시켰고, 분절된 개인들을 전체의 틀에 가두어 전체(선의지)와 개인(도덕적 주체)간의 네트웍에만 몰두하게끔 유도하였습니다. 반면, 분절된 개인과 개인끼리의 소통은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하나 살펴보면 나름 선량한 시민들이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일에 주저함이 없이 동원되도록 길들여졌던 것이죠. 그 대표적 표본이 아이히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치가 자기에게 부과한 일만 숙지했지, 그 집단의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치는 선 그 자체였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하여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집단의 명령이 유대인(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못한 채, 오로지 나치의 명을 따랐던 것입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라 명명하였는데, 결국, 아렌트에게 있어 사유란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레비나스)이고,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칸트)는 명령이며, 타자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 인해서 발생한 악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취향과 전문화의 정도가 심한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분야(혹은 취향) 이외에서 일어나는 증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편화된 개인을 움직이는 현재의 유일한 원리는 오직 자본의 법칙 뿐이죠.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뜨거웠던 이념들은 모두 자본 안으로 흡수된지 오래고, 대통령을 뽑을 때도, 대학 총장을 뽑을 때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모두 자본의 법칙에 순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제1 관심사입니다. 나머지 평가 항목의 총량을 다 합하여도 자본의 원칙 한 종목을 넘지 못합니다. 나치가 독일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통용되었던 국가적 의지의 극대화였다면,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자본은 바야흐로 21세기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세계 시민의 의지이자 숭고함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의 명령 앞에,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명령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철저히 무사유한 상태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됩니다.
다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타자의 윤리학이라 지칭되는 새로운 기독교 윤리학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자본의 논리 속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타자의 신음소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거대한 악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이 신자본주의 질서를 악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악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깨우고 부추긴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드’와 우리의 ‘에고’의 가치를 존중하는 신자유주의의 달콤한 유혹 앞에 인간과 인간, 인간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 등 모든 관계들이 시장판의 논리로 변했다는 점입니다. 이렇듯 자본의 법칙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 내지는 암세포와 같은 생존법칙을 지닙니다.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은 무한질주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2등이 기억되지 않는 1등만이 기억되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광란의 질주에서는 나 이외 다른 타인은 배려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제거의 대상, 내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죠. 이 모든 원인이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안에 깃들어 있는 악의 메커니즘과 전체성을 폭로하는 일, 그리하여 자본의 가치와 대립되는, 하나 하나가 지닌 생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 그것을 향한 연대와 화합을 꾀하는 것이 타자윤리학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 교회의 모습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현대교회는 너무나도 친 자본주의적입니다. 부흥한다는 교회의 시스템은 경영논리와 경영적 마인드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경향은 심화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신학 이외에 MBA 공부를 하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유를 물으면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기업 운영을 잘하려는 경영자로 비쳐집니다. 조엘 오스틴이나 윌로크릭교회 같은 성공 스토리가 미화되고 칭송되고 있는 세대입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고난, 십자가,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보다는 개교회 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승리와 번영, 성공지향적인 말씀선포나 현실의 어려움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개그맨 같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환영 받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목회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질문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저는 현실 교회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적 목회현실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어와 비전을 갖고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시카고에 거주하며 몇 차례 윌로크릭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정서상 그곳으로 예배 드리러 간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나의 익명성이 보장되고 회중 자리에 앉아 있다가 쿨하게 예배 끝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옵니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나와 타자, 나와 신앙공동체 가운데 임재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해방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 등은 모두 한 신앙 공동체로서 그 안에 많은 타자들을 포섭하면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익명성 속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것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교회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닌, 오직 ‘나’에게만 밀착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패턴은 이러한 측면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목사님이 가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올바른 교회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면, 보수적 목회자들은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를 가장 이상적 교회 모델로 보고 있습니다만.
초대교회의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섬겨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나의 필요보다도 더 갈급한 필요를 지닌 타자의 그것을 섬겨주는 공동체,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끈 안에서 가능했던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죠. 타자에 대한 섬김이 이루어 지기 전에 전제가 되어야 할 사항이 바로 타자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저 역시 초대교회를 가장 이상적 교회라 말합니다.
제가 꿈꾸는 차이와 다름, 그리고 섬김을 모토로 하는 21세기 초대교회 모습은 우선 교회 직제의 유연성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 1인 체제를 벗어나 각기 다른 달란트를 지닌 3명 정도의 목회자가 팀사역을 하면서 당회장도 돌아가면서 하고, 장로직도 일정기간 사역했으면 물러나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장로 구성의 성비에서도 의무적으로 50% 가까이 남녀 성비를 맞추어야 합니다. 당회 중심의 권위적 교회 운영보다는 위원회 중심의 사역 시스템으로 교인을 조직하여 그 위원회의 장은 평신도들이 하되 예산을 포함한 독립적인 운영권을 주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각 위원회 별로 고문의 형식으로 위촉이 되고 당회와의 연결도구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구조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그런 통로와 창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흐름이 회중들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다름을 무너뜨리고 막힘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의 의견이 수렴되고 발산되는 공동체, 그런 교회를 한번 꿈꿔 봅니다.
-좀더 현실의 문제로 돌아 와서 시카고 지역 한인교회의 각종 문제에 이 윤리적 잣대를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서두에서 서구윤리의 계보를 언급하면서 칸트 이전의 윤리적 특색이 ‘좋음’과 ‘싫음’, 이 두 축을 특색으로 하는 윤리학이라고 했었죠. ‘좋음’은 ‘선’이고 ‘싫음’은 ‘악’입니다. 좋음의 범주에 편입될 수 있는 것에는 익숙함, 친숙함, 같음 등이 포함되고, 싫음의 범주에는 다름, 낯섦, 불편함 등이 포함됩니다. 현재 시카고 교계 분쟁의 원인은 싫음과 악을 동일시 한다는 점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 내가 지지하는 목사님, 혹은 장로님을 비판하는 행위는 악입니다. 그것은 악이 아니라 다름일 뿐입니다. 다름은 대화와 공감과 설득과 양보와 합의의 대상이지 제거와 죽임과 저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카고 한인교회의 분쟁을 보면 안타깝게도 모두 이러한 현상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무척이나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 나에게 낯선 매체 내지는 의사소통의 방식, 나의 관성(관행)과는 다른 법칙 내지는 의견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정죄하고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악성 루머를 만들어 매도하는 패턴은 일반적으로 분쟁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주도층, 비판적 지식인들의 참여 등으로 인해 어느 정도 거품이 제거되고 대강의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시카고 교계는 예외적입니다. 왜 무엇이 시카고의 교회분쟁을 가속화, 저질화, 고립화 시키는가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기독교적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심각한 연구의 대상이라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카고 교계의 문제뿐 아니라 시카고 한인 이민 사회와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과 제휴하여 대대적인 조사와 연구를 전개할 필요를 느낍니다.
-시카고 한인 이민 교회가 확립해야 할 기독교 윤리의 현실적 과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몸의 어느 조직에서, 예를 들어 팔, 다리, 머리카락 등에서 세포를 떼어내 DNA 검사를 해도 모두 결과는 같습니다. 시카고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커뮤니티입니다. 이것이 시카고가 지니고 있는 지역적 DNA의 특징입니다. 시카고에 있는 한인교회 역시 시카고가 지닌 이러한 DNA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민 1세대 시카고 한인교회는 이러한 법칙과는 동떨어진 역사를 그려 왔습니다. 물론 시카고 이민 1세대 한인교회의 역사는 그것 자체로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분명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제 2세대 시카고 한인 이민교회의 역사를 위한 초석임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시카고 이민교회 제2기의 역사는 시카고가 지닌 이러한 다름의 컨텍스트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카고 한인들은 흑인 거주지역 혹은 라티노 거주지역에서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그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백인들과도 상대하지요. 요즘은 중국, 인도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의 종교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한국교회의 천편일률적인 직제와 예배와는 달리 미국교회는 각 교단별로 색채가 확연히 다릅니다. 흑인교회는 또 교단과 상관없이 독특한 흑인교회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인 이민교회는 시카고의 이러한 다양한 인종, 종교, 관습과의 소통과 관심, 열림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한인 2세 교회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시카고 한인교회에 2세들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 교회로 가든 아니면, 범아시아권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한인 2세들은 신앙생활을 접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한인교회에서 2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입니다. 이는 단순히 영어권 교역자에 대한 문제로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인 시카고의 지역적 DNA에 노출되어 성장한 한인 2세들에게 있어 현 한인 1세 교회의 구조는 너무나도 폐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의 70-80년대 문화를 그대로 이식해 온 보수적 교회 운영과 한국보다 더 답답한 가부장제에 입각한 교회문화가 청년들을, 한인 2세들을 세상 밖으로 내몰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진단일까요?
또 한인교회는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 특징지어지는 시카고의 지역적 DNA를 수용하기 이전에, 세대간 차이와 다름을 극복해야 하는 근본적 과제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2세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선물을 보내는 일회적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의 체질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차이와 다름에 대한 무시와 명령, 진압과 배제의 차원이 아닌, 교회 내 구성체들끼리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실제 우리 교회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고민이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그 과제에 도전하는 한인교회만이 앞으로의 미래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목사님은 목회에서 다름의 윤리학, 타자성의 윤리학을 적용해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지금 레익뷰교회에서 한어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청년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시카고로 건너온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입니다. 저 역시 유학생인지라 그 사정을 잘 알지요. 저희 레익뷰 베냐민 청년부에서 2007년부터 매년 “F-1 유학생을 위한 바자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해 다른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자신들도 유학생인 주제에 자기들보다 어려운 유학생(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위해 모이고 열정을 쏟는 청년들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내부를 장식하고 초대장, 포스터를 만들어 배부하고 홍보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무척 힘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기쁘고 재미있게 협력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고, 만난 적도 없는 타자를 위한 열림이라는 그 자체가 저희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지도 않고 우리가 아는 사람도 아닌 타자를 환대하는 것을 실험해 본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누굴 정해서 주자 했으면 당장 싸움이 났을 겁니다. 타자를 환대하는 윤리, 타자를 위한 우리라는 이 감동이 큽니다. 아마 제가 성인 목회를 한다면 교회 구성체들과 함께 또 다른 적용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끝으로 기독교 윤리학의 사명에 관해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인류 역사에 발생했던 모든 분쟁과 다툼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타자에 대한 정복과 지배의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1차적 과제는 그 욕망의 죄악됨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욕망을 구동시키는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인터뷰에서 계속 지적했던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차이와 다름에 대한 환대와 열림이라는 단순한 구호의 나열이 아니라 구체적인 프락시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재무장까지가 기독교윤리의 전영역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이사야 11장에 이리와 어린 양이 뛰놀고, 아이와 독사가 함께 하는 그런 세상을 그리는 대목이 떠오르네요. 이리와 어린양, 아이와 독사는 서로 타협이 불가능한, 서로가 지닌 급격한 타자성으로 인해 조합이 불가능한 만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타자성이 다 화해되고 용인되고 무화되는 그런 곳을 상상합니다. ‘타자의 윤리학’이 꿈꾸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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