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신년을 맞이해 세대교체, 교회연합, 2세 사역, 부흥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시카고 지역 목회자 40인을 만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시카고 한인교회의 여론을 수렴하고 한인교회의 미래와 나아갈 바를 조명하고자 함이다. 40인 인터뷰는 시카고 교계의 발전을 위한, 가능한 모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세, 목회자의 교단적 배경, 목회 연수 등에 관계없는 순으로 게재된다.
열아홉번째 인터뷰는 레익뷰한인장로교회 이종민 원로목사다. 이 목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B.Th.)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M.)를 마쳤다. 일본 동경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다 오하이오의 Winebrenner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해 목회학 석사(M.Div.)를 마쳤다. 이후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 1977년 레익뷰교회를 개척했으며 모교인 맥코믹에서 객원교수로 가르쳤다. 소속 교단인 미국장로교의 한인교회협의체인 NKPC에서 제36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이 목사는 레익뷰교회를 개척해 30년간 시무하며 시카고의 가장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시켰다. 2세 교회를 3곳이나 개척해 내보냈다. 나일스한국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한인 2세를 키웠다. 거대한 성전까지 성공적으로 건축하고 그에 소요된 대출금까지 다 갚은 후, 그는 돌연히 은퇴를 선언했다. 정년이 다 됐다는 이유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목회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해 교회에 넘겨 주었다.
떠날 때 두가지를 당부했다. “교회의 모든 빚은 현재 다 갚았다. 그런데 괜히 내 은퇴를 예우해 준다고 빚을 내서 후임 목사에게 부담을 주지 마라”와 “후임 목사를 교회가 잘 상의해 청빙하라”였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행정은 물론 후임 목사 청빙 등 모든 일에서 손을 땐 후, 텍사스 오스틴장로교회의 임시 목회자(interim pastor, 목회자 사임 후 청빙까지 그 교회를 맡으며 설교, 후임 청빙 준비 등을 돕는 목회자)로 떠났다. 그리고 박규완 목사가 레익뷰교회에 청빙돼 위임예배를 드릴 때, 다시 교회를 찾아와 설교를 전했다.
세상 말로 “이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목회자”였던 이종민 목사를 만난 곳은 레익뷰교회의 회의실이었다. 안디옥기도원에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아 강의하고 박규완 후임 목사에게 교회 및 등기 서류 등을 인수인계 해 주기 위해 잠깐 들렀다고 한다. ‘거대한 교회를 일구어낸 목회자’에서 ‘모든 것을 깨끗이 놓아 버린 목회자’가 된 이 목사는 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간단히 인사한 후, 한 회의실로 우리를 데려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무실은 레익뷰교회가 학교 건물을 매입한 후 처음으로 예배드린 장소라고 한다.
-이종민 목사님은 시카고 교계의 대표적인 선배 목회자이십니다. 선배로서 교계를 보실 때, 이 지역의 목회자 공석 현상에 관해 어떻게 보십니까? 목회자가 성도들과 갈등을 빚고 교회를 떠나는 현상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지 1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내가 떠난 후 갑자기 공석이 된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던 어떤 분도 몇 년 하시다 떠났고 어느 교회는 새 목사가 위임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떠났다고 합니다. 역사와 유서가 깊은 교회 중에도 목회자가 공석인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목회자는 참 훌륭한데 그의 목회 철학이 교회와 맞지 않을 때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의욕적으로 잘 하려고 해도 그것이 교회의 상황과 맞지 않을 때는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도 한 3년 정도는 목사가 자신의 비전을 펼칠 수 있게 도와 줘야 하는데, 그런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목사도 성도들의 몸에 밴 스타일을 금방 뜯어 고치려고 해서도 안되죠. 목회자도 참아야 하고 성도도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목회자와 성도의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70년대에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육적 돌봄을 안할 수 없었습니다. 이민 성도들이 오면 공항 픽업부터 시작해서 목사의 집에서 재워주며 아파트를 구해주고 직장을 구해주는 모든 일을 목사가 했습니다. 아파트에 전기, 개스 개통도 목사가 해 주었고 자동차를 구매할 때 코사인도 해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는 병원에서 예방접종까지 받을 수 있도록 뛰고 또 뛰었습니다. 말 그대로 손과 발이었습니다. 이민자의 현실에서 목사의 역할이 그런 돌봄과 섬김이었습니다. 그때는 시카고에 교회가 한 20개 있었는데 목사들이 이민자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 서로를 아꼈습니다.
그런데 이민 역사가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민자들과 혹은 한국에서 안정된 상황에서 이민 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이제는 목회자의 영성이 문제가 됐습니다. 밤낮으로 뛰는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 설교가 좀 약합니다”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는 목사들이 맨발에서 시작해 교회를 개척한 것이기에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된 성도들이 새로 온 목회자를 내보내는 것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결론은 목사의 영성입니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설교나 말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성도들의 신앙도 따라서 약해집니다.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목사의 말씀의 힘, 영력이 약할 때 성도들의 신앙은 식어지고 목사 역시 스스로 지쳐 버립니다. 충만한 영성이 교회에서 나타날 때 그 교회에는 분쟁과 갈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그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 레익뷰교회에서 담임목회 하실 때 갈등이 발생한 적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1977년 1월 23일에 15명이 창립했습니다. 그때 내가 34살이었고 제일 나이 많은 분이 39살이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이 교회의 원로 장로로 계십니다. 저는 성도들보다 나이가 어린 목회자였는데 우리 교회는 이런 갈등이 제 기억으론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한 것은 아니고 성도들이 좋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목사 하나도 우리가 내보내 본 적이 없습니다. 전도사, 직원, 사찰까지도 스스로 나간 적은 있어도 내보내지 않은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다 담임목사, 교수, 다른 직장을 찾아 스스로 사임하면 축복하고 보내 주었습니다.
제가 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성도들은 다 순수합니다. 목회자가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좇아 가면 성도들도 따라 옵니다. 목회자가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스타일대로 목회하면 평신도 리더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럼 모두 자기 권익만 따지게 되고 얼마 못 가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민교회 목사는 맞아야 한다. 많이 맞아야 잘된다”라고 합니다. 목사가 많이 맞고 섬기고 내어 주어야겠습니다.
- 레익뷰교회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목사님의 리더십 스타일과도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다 내려 놓는 것 외엔 없습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교회도 사실 맨손으로 개척해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능력으로 된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다 내려 놓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저는 부목사들과도 목회 정보를 자주 교류했습니다. 저 혼자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한달치씩 본문을 미리 알려주고 부목사들과 함께 의논하며 주일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70년대 신학을 했고 이 사람들은 2000년대에 신학을 했으니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도 자료를 모아서 회의에 제출하고 저는 그들의 설교에 코멘트를 해 주며 협력했습니다. 일종의 팀목회였습니다.
그러나 담임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관, 목회관이 뚜렷해야 합니다. 고집처럼 밀고 나가고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대학교 교수부터 나이많은 어르신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주문을 해도 다 다른 음식을 시키지 않습니까? 목회도 요리입니다. 성도들이 누구라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고 준비하는 것은 목사의 뚜렷한 설교관, 목회관에서 나오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레익뷰교회는 2세 사역으로도 유명한데 1세와 2세가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분립 개척됐지요?
사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아니고 교회가 성장하니 분립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때부터 주류사회에 들어갈 2세 한인 지도자를 키우는 것을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전 11시 메인 시간 본당을 2세 예배에 주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고맙게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1984년 이 학교를 매입했습니다. 창립한지 7년만에 이 건물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후진을 양성할 학교를 꼭 세우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학교 건물을 매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일스한국학교로 성장했습니다. 학교 건물을 교회로 바꿀 때, 체육관을 성전으로 리모델하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2세, 3세를 위한 교회인데 이 체육관을 성전으로 리모델 해 버리면 우리 자녀들은 어디서 운동합니까? 안됩니다. 우리는 성도가 150명이니 학교 교실을 몇 개 공간을 터서 예배드리고 체육관은 그냥 둡시다. 우리 교회가 성장하면 그때 체육관 반대쪽에 성전을 지읍시다.” 그래서 교실 3개를 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실 3개를 텄으니 예배당이 아주 길었고 “기차교회”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성도 150명이 의자 3백개를 놓고 예배드리며 “기드온의 3백 용사를 주십시오” 했는데 3년만에 3백개 자리가 꽉 찼습니다. 그래서 이제 때가 됐다고 하면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독일 신학자 본 회퍼는 “인간은 남을 위한 존재다”라고 했는데 우리 교회는 그러했습니다. 2세들을 위한 교회였고 2세들 장학금도 만들어 수여했습니다.
1994년 조슈아 강 목사가 풀타임으로 우리 EM에서 사역하면서 EM이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1백명을 넘을 때 독립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해 자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했습니다. 150명이 넘어가니 재정까지 독립됐습니다. 재정이 독립됐지만 건물은 1세 교회를 사용하니 헌금을 쓸 곳이 적었고 70만불의 자체 재정까지 갖게 됐습니다. 이곳에 3명의 장로가 세워질 때 우리는 이 교회를 분립시켰습니다. 장로 중에 한명은 흑인입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한인 2세 교회가 됐습니다. 그게 Lakeview Church(EM)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Cityview Church입니다. Lakeview Church 부목사로 있던 피터 김 목사가 드폴대학교 근교에서 학원선교를 하면서 영어권을 개척했는데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교회는 다운타운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Lakeview에서 Cityview가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서북부에 거주하는 2세들을 위해 별도로 교회를 개척하려 할 때, 뉴라이프교회 장춘원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 교회 2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뉴라이프교회 건물을 리모델해 2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와 힘을 모아 2세 교회 Lakeview Palatine이 됐습니다.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서 50명이 그 교회로 갔는데 지금은 1백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1세보다 2세, 3세가 더 큰 교회입니다.
- 2세 교회를 분립시키는 것은 교회 재정에도 부담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또 다른 교회와 협력해 2세 교회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뭐, 어렵습니까?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요. 그리고 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교단, 교파 따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도님들도 한명 반대함 없이 잘 따라 주셨습니다.
- 교회의 사회복지나 사회참여 문제에 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유학 올 때 비행기 삯이 없어서 해외 입양되는 어린이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해서 비행기를 얻어 탔습니다. 75년 시카고에 와서 한인사회복지회에서 소셜워커로 일하며 신현정 목사와 함께 기독교 사회 복지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일이 지금은 예산이 250만 달러에 달하는 큰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민자들을 위해서 한국어 운전면허 시험도 주정부에 허가받는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린이 교육을 위해 설립한 나일스한국학교 외에도 1997년에 노인 교육을 위해 노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불교인이건 가톨릭인이건 누구건 와서 교육받았습니다. 이것은 자녀가, 혹은 부모가 다니는 학교에 와 보고 우리 교회로 청,장년층이 전도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인 이상 교회가 세속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목마른 자, 굶주린 자를 돕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저는 민주화운동과 진보신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동경신학교도 진보적 색채가 강한 학교였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경찰서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이것은 제 행동하는 신앙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제 목회 철학은 아닙니다. 제 목회는 오직 믿음, 은혜, 성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에서 목회하면서도 일본 교과서 왜곡 등에 관해 반대하며 일본 영사관에서 시위했지만 이것은 저 혼자 제 양심에 따라 했지 성도들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목회는 온전히 말씀과 복음에만 서 있어야 하고 신앙양심에 따라 참여할 사람은 하고, 아닌 사람은 안하면 됩니다.
- 시카고 교계 연합활동에 관해서 혹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참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교협, 교역자회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초창기에는 좀 관여해서 일했지만 저도 목회할 때 많이 돕지 못했습니다. 신년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회비를 보내는 것 외에는 크게 돕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의 2백개 교회가 그런 작은 일이라도 참여한다면 교협 이름으로 대사회 구제도 하면서 이민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기 수월할 것입니다.
-오늘 귀한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열아홉번째 인터뷰는 레익뷰한인장로교회 이종민 원로목사다. 이 목사는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B.Th.)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Th.M.)를 마쳤다. 일본 동경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다 오하이오의 Winebrenner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해 목회학 석사(M.Div.)를 마쳤다. 이후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 1977년 레익뷰교회를 개척했으며 모교인 맥코믹에서 객원교수로 가르쳤다. 소속 교단인 미국장로교의 한인교회협의체인 NKPC에서 제36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이 목사는 레익뷰교회를 개척해 30년간 시무하며 시카고의 가장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시켰다. 2세 교회를 3곳이나 개척해 내보냈다. 나일스한국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한인 2세를 키웠다. 거대한 성전까지 성공적으로 건축하고 그에 소요된 대출금까지 다 갚은 후, 그는 돌연히 은퇴를 선언했다. 정년이 다 됐다는 이유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목회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해 교회에 넘겨 주었다.
떠날 때 두가지를 당부했다. “교회의 모든 빚은 현재 다 갚았다. 그런데 괜히 내 은퇴를 예우해 준다고 빚을 내서 후임 목사에게 부담을 주지 마라”와 “후임 목사를 교회가 잘 상의해 청빙하라”였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행정은 물론 후임 목사 청빙 등 모든 일에서 손을 땐 후, 텍사스 오스틴장로교회의 임시 목회자(interim pastor, 목회자 사임 후 청빙까지 그 교회를 맡으며 설교, 후임 청빙 준비 등을 돕는 목회자)로 떠났다. 그리고 박규완 목사가 레익뷰교회에 청빙돼 위임예배를 드릴 때, 다시 교회를 찾아와 설교를 전했다.
세상 말로 “이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목회자”였던 이종민 목사를 만난 곳은 레익뷰교회의 회의실이었다. 안디옥기도원에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아 강의하고 박규완 후임 목사에게 교회 및 등기 서류 등을 인수인계 해 주기 위해 잠깐 들렀다고 한다. ‘거대한 교회를 일구어낸 목회자’에서 ‘모든 것을 깨끗이 놓아 버린 목회자’가 된 이 목사는 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간단히 인사한 후, 한 회의실로 우리를 데려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무실은 레익뷰교회가 학교 건물을 매입한 후 처음으로 예배드린 장소라고 한다.
-이종민 목사님은 시카고 교계의 대표적인 선배 목회자이십니다. 선배로서 교계를 보실 때, 이 지역의 목회자 공석 현상에 관해 어떻게 보십니까? 목회자가 성도들과 갈등을 빚고 교회를 떠나는 현상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지 1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내가 떠난 후 갑자기 공석이 된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던 어떤 분도 몇 년 하시다 떠났고 어느 교회는 새 목사가 위임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떠났다고 합니다. 역사와 유서가 깊은 교회 중에도 목회자가 공석인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목회자는 참 훌륭한데 그의 목회 철학이 교회와 맞지 않을 때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의욕적으로 잘 하려고 해도 그것이 교회의 상황과 맞지 않을 때는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도 한 3년 정도는 목사가 자신의 비전을 펼칠 수 있게 도와 줘야 하는데, 그런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목사도 성도들의 몸에 밴 스타일을 금방 뜯어 고치려고 해서도 안되죠. 목회자도 참아야 하고 성도도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목회자와 성도의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70년대에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육적 돌봄을 안할 수 없었습니다. 이민 성도들이 오면 공항 픽업부터 시작해서 목사의 집에서 재워주며 아파트를 구해주고 직장을 구해주는 모든 일을 목사가 했습니다. 아파트에 전기, 개스 개통도 목사가 해 주었고 자동차를 구매할 때 코사인도 해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는 병원에서 예방접종까지 받을 수 있도록 뛰고 또 뛰었습니다. 말 그대로 손과 발이었습니다. 이민자의 현실에서 목사의 역할이 그런 돌봄과 섬김이었습니다. 그때는 시카고에 교회가 한 20개 있었는데 목사들이 이민자들의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 서로를 아꼈습니다.
그런데 이민 역사가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민자들과 혹은 한국에서 안정된 상황에서 이민 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이제는 목회자의 영성이 문제가 됐습니다. 밤낮으로 뛰는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 설교가 좀 약합니다”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는 목사들이 맨발에서 시작해 교회를 개척한 것이기에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된 성도들이 새로 온 목회자를 내보내는 것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결론은 목사의 영성입니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 설교나 말씀이 약해질 수 밖에 없고 성도들의 신앙도 따라서 약해집니다.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목사의 말씀의 힘, 영력이 약할 때 성도들의 신앙은 식어지고 목사 역시 스스로 지쳐 버립니다. 충만한 영성이 교회에서 나타날 때 그 교회에는 분쟁과 갈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그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 레익뷰교회에서 담임목회 하실 때 갈등이 발생한 적이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1977년 1월 23일에 15명이 창립했습니다. 그때 내가 34살이었고 제일 나이 많은 분이 39살이었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이 교회의 원로 장로로 계십니다. 저는 성도들보다 나이가 어린 목회자였는데 우리 교회는 이런 갈등이 제 기억으론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한 것은 아니고 성도들이 좋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목사 하나도 우리가 내보내 본 적이 없습니다. 전도사, 직원, 사찰까지도 스스로 나간 적은 있어도 내보내지 않은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다 담임목사, 교수, 다른 직장을 찾아 스스로 사임하면 축복하고 보내 주었습니다.
제가 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성도들은 다 순수합니다. 목회자가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좇아 가면 성도들도 따라 옵니다. 목회자가 자기 고집대로 살고 자기 스타일대로 목회하면 평신도 리더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럼 모두 자기 권익만 따지게 되고 얼마 못 가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민교회 목사는 맞아야 한다. 많이 맞아야 잘된다”라고 합니다. 목사가 많이 맞고 섬기고 내어 주어야겠습니다.
- 레익뷰교회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목사님의 리더십 스타일과도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다 내려 놓는 것 외엔 없습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교회도 사실 맨손으로 개척해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능력으로 된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다 내려 놓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저는 부목사들과도 목회 정보를 자주 교류했습니다. 저 혼자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한달치씩 본문을 미리 알려주고 부목사들과 함께 의논하며 주일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70년대 신학을 했고 이 사람들은 2000년대에 신학을 했으니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도 자료를 모아서 회의에 제출하고 저는 그들의 설교에 코멘트를 해 주며 협력했습니다. 일종의 팀목회였습니다.
그러나 담임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관, 목회관이 뚜렷해야 합니다. 고집처럼 밀고 나가고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대학교 교수부터 나이많은 어르신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주문을 해도 다 다른 음식을 시키지 않습니까? 목회도 요리입니다. 성도들이 누구라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고 준비하는 것은 목사의 뚜렷한 설교관, 목회관에서 나오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레익뷰교회는 2세 사역으로도 유명한데 1세와 2세가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분립 개척됐지요?
사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아니고 교회가 성장하니 분립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때부터 주류사회에 들어갈 2세 한인 지도자를 키우는 것을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전 11시 메인 시간 본당을 2세 예배에 주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고맙게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1984년 이 학교를 매입했습니다. 창립한지 7년만에 이 건물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후진을 양성할 학교를 꼭 세우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학교 건물을 매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일스한국학교로 성장했습니다. 학교 건물을 교회로 바꿀 때, 체육관을 성전으로 리모델하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2세, 3세를 위한 교회인데 이 체육관을 성전으로 리모델 해 버리면 우리 자녀들은 어디서 운동합니까? 안됩니다. 우리는 성도가 150명이니 학교 교실을 몇 개 공간을 터서 예배드리고 체육관은 그냥 둡시다. 우리 교회가 성장하면 그때 체육관 반대쪽에 성전을 지읍시다.” 그래서 교실 3개를 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실 3개를 텄으니 예배당이 아주 길었고 “기차교회”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성도 150명이 의자 3백개를 놓고 예배드리며 “기드온의 3백 용사를 주십시오” 했는데 3년만에 3백개 자리가 꽉 찼습니다. 그래서 이제 때가 됐다고 하면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독일 신학자 본 회퍼는 “인간은 남을 위한 존재다”라고 했는데 우리 교회는 그러했습니다. 2세들을 위한 교회였고 2세들 장학금도 만들어 수여했습니다.
1994년 조슈아 강 목사가 풀타임으로 우리 EM에서 사역하면서 EM이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1백명을 넘을 때 독립적으로 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해 자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했습니다. 150명이 넘어가니 재정까지 독립됐습니다. 재정이 독립됐지만 건물은 1세 교회를 사용하니 헌금을 쓸 곳이 적었고 70만불의 자체 재정까지 갖게 됐습니다. 이곳에 3명의 장로가 세워질 때 우리는 이 교회를 분립시켰습니다. 장로 중에 한명은 흑인입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한인 2세 교회가 됐습니다. 그게 Lakeview Church(EM)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Cityview Church입니다. Lakeview Church 부목사로 있던 피터 김 목사가 드폴대학교 근교에서 학원선교를 하면서 영어권을 개척했는데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교회는 다운타운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Lakeview에서 Cityview가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서북부에 거주하는 2세들을 위해 별도로 교회를 개척하려 할 때, 뉴라이프교회 장춘원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 교회 2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뉴라이프교회 건물을 리모델해 2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와 힘을 모아 2세 교회 Lakeview Palatine이 됐습니다. 시작할 때 우리 교회에서 50명이 그 교회로 갔는데 지금은 1백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1세보다 2세, 3세가 더 큰 교회입니다.
- 2세 교회를 분립시키는 것은 교회 재정에도 부담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또 다른 교회와 협력해 2세 교회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뭐, 어렵습니까?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요. 그리고 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교단, 교파 따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도님들도 한명 반대함 없이 잘 따라 주셨습니다.
- 교회의 사회복지나 사회참여 문제에 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유학 올 때 비행기 삯이 없어서 해외 입양되는 어린이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해서 비행기를 얻어 탔습니다. 75년 시카고에 와서 한인사회복지회에서 소셜워커로 일하며 신현정 목사와 함께 기독교 사회 복지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일이 지금은 예산이 250만 달러에 달하는 큰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민자들을 위해서 한국어 운전면허 시험도 주정부에 허가받는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린이 교육을 위해 설립한 나일스한국학교 외에도 1997년에 노인 교육을 위해 노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불교인이건 가톨릭인이건 누구건 와서 교육받았습니다. 이것은 자녀가, 혹은 부모가 다니는 학교에 와 보고 우리 교회로 청,장년층이 전도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인 이상 교회가 세속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목마른 자, 굶주린 자를 돕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저는 민주화운동과 진보신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동경신학교도 진보적 색채가 강한 학교였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경찰서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이것은 제 행동하는 신앙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제 목회 철학은 아닙니다. 제 목회는 오직 믿음, 은혜, 성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에서 목회하면서도 일본 교과서 왜곡 등에 관해 반대하며 일본 영사관에서 시위했지만 이것은 저 혼자 제 양심에 따라 했지 성도들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목회는 온전히 말씀과 복음에만 서 있어야 하고 신앙양심에 따라 참여할 사람은 하고, 아닌 사람은 안하면 됩니다.
- 시카고 교계 연합활동에 관해서 혹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참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교협, 교역자회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초창기에는 좀 관여해서 일했지만 저도 목회할 때 많이 돕지 못했습니다. 신년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회비를 보내는 것 외에는 크게 돕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의 2백개 교회가 그런 작은 일이라도 참여한다면 교협 이름으로 대사회 구제도 하면서 이민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기 수월할 것입니다.
-오늘 귀한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