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지역 선교 초기 역사를 갈무리하다(1918)

하위렴은 목포 사역(1909~1912)을 끝내고 안식년(1912~1915)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군산에 부임하면서 그는 군산 선교의 초기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 군산 선교를 시작했던 전킨은 물론 당시 그와 함께 사역했던 데이비스마저 유명을 달리해 버린 데다 의료선교사 드루조차 신병身病으로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척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부위렴 선교사 내외가 부임해 있었지만, 내한 연도로 보아도 하위렴 선교사보다 3년이나 늦고 나이로 쳐도 하위렴보다 10년이나 연하였기 때문에 선교지부에 대한 실질적 책임과 리더십은 늘 하위렴에게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위렴은 자신의 파송 20주년(1918)을 즈음해 자신의 기억 속에 남겨진 초기선교 개척사를 선교잡지에 게재하면서 자신의 기록이 후세의 역사가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기사의 끝부분에 기록한 의도를 밝혀두기도 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말미암아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역사가들에게 남기고자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선교지부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전킨과 드루가 준비를 위해 지부를 비웠을 때(1896) 하위렴이 군산 스테이션에 머문 적도 있었고, 데이비스의 사망 후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해 군산지부를 실제로 이끌었던 그였기 때문에 군산지역의 초기선교에 대한 하위렴의 기록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기록한 군산 초기선교 역사는 연대기적 사건의 순서로 본다면 당연히 서두에서 다뤄야 하겠지만, 하위렴의 행적을 따라가는 서술의 순서상 그가 선교잡지에 게재한 시점을 따라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 선교사들의 군산 정착

선교지부 설치를 위해 맨 먼저 레이놀즈와 드루가 도착해 살펴보았던 군산의 인문지리적 개황과 특징 그리고 군산에 도착하면서부터 군산에 매혹되어 버린 드루 박사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금강 입구의 작은 포구 군산은 제물포에서 남쪽으로 120마일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아는 한이 곳을 처음 방문한 선교사이자 서양인은 레이놀즈와 드루였다. 선교를 위해 이 지역을 살피러 온 것은 1894년 가을이었다. 당시 군산은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마을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조그만 증기선을 겨우 댈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포구의 조건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양호하거나 가망성이 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밀하게 펼쳐진 매혹적인 농경지만큼은 장래성이 있는 지역으로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누구보다도 드루 박사는 이곳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1895년경의 수덕산 전경
(Photo : ) 1895년경의 수덕산 전경

당시 호남 일대는 동학농민항쟁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영사관에서조차 선교사들의 신 변 안전을 위해 이 지역의 여행을 자제시키며 일단 서울로 철수를 권고하고 있었다. 얼마 후 사태가 수습되자 선교부에서는 다시 대책을 세우고, 군산지부 개설에 대한 책임을 전킨과 드루에게 맡겼다.

곧바로 그들은 네 명의 선원을 포함한 범선 한 척을 세내어 약과 책 그리고 약간의 생필품을 싣고 제물포를 떠나 군산으로 향했다.

"1895년 3월 전킨과 드루가 다시 범선을 타고 제물포를 출발했으나, 비와 안개 때문에 11일이나 걸린 끝에 겨우 군산에 도착했다."

군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 달 남짓 답사를 하며 진료와 전도를 펼치는 동안, 놀랍게도 두 사람 의 신자를 얻기도 했는데 그들은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사비私費를 들여 임시거처까지 마련해 주었으며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교사들에게 다시 그들이 돌아오면 학습을 받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896년 4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전킨과 드루의 가족이 군산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들은 답사 당시 보아 두었던 거처에 짐을 풀고 선교지에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드루의 집은 현재의 우체국 앞쪽에 있는 언덕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드루의 집 뒷마당에 있었던 우물이 지금도 거기에 남아있으며, 전킨의 집은 드루의 집에서 동남 방향으로 지척에 있었다."

하위렴은 당시 선교사들의 머물던 거처에 대한 묘사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남기고 있는데 심지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우물의 위치까지도 언급하며 그 주변에 초기 선교사들의 집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기억해낸 정보와 자료 등이 어쩌면 이 지역 초기선교 역사 복원에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 주민들의 생활상

개항되기(1899) 전까지만 해도 외부 세계와 소통이 될 수 있는 인프라가 전혀 없었던 군산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선교사의 눈에 비친 가난하고 무지했던 주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부두에 정박시설은 물론 우체국이나 전화국도 없었다. 길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데다 불결하기까지 했다. 교환수단이라고는 오직 구리 엽전이었으며 은을 가지고도 물건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 세관이 있는 자리와 그 남쪽으로 난 해변을 따라 고작 100여 채의 초가집들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대다수가 음주와 도박에 빠져있었고, 여자들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며 잘 싸웠고 걸핏하면 무당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외국인들에게만큼은 친절했는데 특히 외국인 여자들이 외출이라도 하면 그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그들이 하는 일이나 행동에 언제나 커다란 관심을 보였으며 즐거운 화제로 삼기도 했다."

"조선인들이 사는 초가집은 유리창과 굴뚝이 없고, 크기가 8x12피트보다 작았으며 무엇보다도 가사를 도울 도우미를 구하는 문제는 심각했다. 적절하게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이 없는 데다가 젊은 여자들은 관습상 집 밖으로 외출이 금지되었고, 나이 든 여자들은 아예 배우려 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존여비 관습에 찌들어,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주기까지 해야만 하는 남자들만 제외한다면 군산에서의 삶은 지극히 단순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