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6.25사변 76주기를 지나면서, 그 때 순교한 사랑의 성자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殉敎史)를, 필자가 저술한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권에 기록한 내용을 두 번에 옮겨 보겠습니다.
사랑의 성자 손양원(孫良源 1902-1950)은 1902년 경남 함안군(咸安郡) 칠원면(漆原面)에서 손종일(孫宗一)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부친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손양원이 고향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학교가 동방요배(東方遙拜:동경에 있는 일본 왕에게 절함)를 강요하자, 이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며 단호히 거절하여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있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고학을 하면서 중동(中東)중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부친이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면서, 그는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아, 그의 부친과 더불어 항일 투쟁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손양원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소압(巢鴨)중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길거리에서 동양 선교회 노방전도대의 전도에 큰 감동을 받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이 성경학교에서 가르치던 주기철 목사를 만나, 그를 일생 동안 스승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1925년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부산 나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보통 사람들이 꺼려하는 나병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의 아가페 사랑의 사역은 시작되었다.
손양원은 1935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한 이듬해 손전도사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경영하던, 전남 여수 근처의 나병원 애양원(愛養院)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에서 목회함으로, 지역 장벽의 담을 허는 일에 솔선하였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던 1938년에 장로회 총회가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선포하자, 손양원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일제는 1940년 9월, 손양원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청주형무소에 수감하고 온갖 핍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그가 심문을 당할 때, “왜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하지 않으냐.”고 일본인 형사가 다그치자 “나는 국민 된 도리로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에 형사는 깜짝 놀라 “그게 무슨 소리냐? 국민이면 당연히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고 이를 실행해야 되지 않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손양원은 “나는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만일 일본이 계속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므로, 국민 된 도리로 국가가 망하는 것을 원치 않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죽음과 같은 6년 동안 감옥에서 형극의 길을 걸어온 손양원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석방되자 과거에 목회하던 애양원교회로 돌아왔는데, 이 때 1천 여 명의 나병환자들과 아이들이 뛰어나와 손양원을 환영하며,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으니 위대한 투사의 금의환향이었다.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3월 손양원은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손 목사의 평온한 삶도 잠시뿐, 곧 그와 그 가족이 피해갈 수 없는 시련이 닥쳐왔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이 터졌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를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 진압을 위해 파견하는 과정에서, 이 부대에 속한 남로당 조직책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 등지를 사흘 동안 점령하고, 경찰관 가족 등 우익 진영의 인사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손 목사의 첫 아들 동인(東仁, 25)과 동생 동신(東信, 19)이, 공산당 급우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 반란의 주모자들이 처형될 때, 동인 형제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강재선(姜在善)도 있었다. 손 목사는 군 사령관에게 그의 사면을 특청(特請)하여, 강재선을 석방시켜, 양아들로 입적시키고, 예수를 믿게 하여 부산성경학교에 보냈다. 두 아들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양 아들로 삼은 손 목사의 결단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해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 글에서는 손 목사의 순교에 대해 쓰겠습니다.) 샬롬.
L.A.에서 김 인 수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