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능이 중단된 아이티
무의촌, 무교육 마을에 ‘꿈’을
선교를 위해 준비해 온 삶

세계 최빈국이자 갱단들이 활보하는 무정부 상태의 땅, 아이티(Haiti). 그곳의 새벽은 정적 속에 흐르는 나직한 기도 소리로 열린다.

이현우 선교사(76)의 하루는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2시에 시작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사무실에서 성경을 펴고 하나님과 만나는 이 시간은 그가 사역을 이어갈 지혜와 힘을 얻는 유일한 시간이다.

6살 때부터 수없이 읽어온 말씀이지만, 매일 아침 전해지는 지혜는 늘 새롭다. 이어 새벽 4시가 되면 그는 현지인 케니 목사를 비롯한 단기선교 팀원들과 함께 새벽 예배를 드 리며 아이티의 부흥을 간구한다.

“한국 교회 부흥의 동력은 새벽 기도였습니다. 아이티 사람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법을 배워야 나라가 변합니다.”라는 이현우 선교사의 말에는 아이티의 영적 변화를 향한 절실함이 담겨 있다.

노란 버스에 실린 생명줄

예배를 마친 이현우 선교사 오전은 ‘노란 버스’와 함께 시작된다.

이현우 선교사
(Photo : 유 튜브 스푼TV 캡쳐) 이제는 아이티 의료선교의 상징이 된 노란버스 안에서 이현우 선교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팬데믹 기간 중 미국에서 스쿨버스를 구입해 직접 이동식 진료소로 개조한 이 버스는 현재 100여 개가 넘는 아이티 오지 마을을 누비며 주민들의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의사인 그는 버스 안에 설치된 6개의 침대를 누비며 침술로 환자들을 돌본다. 그의 의료 철학은 확고하다.

“내가 치료하는 것이 50%, 우리 팀(브리지원 단기선교팀)의 기도가 50%입니다. 기도가 반이고 치료가 반일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현우 선교사
(Photo : 김선영 씨(왼쪽에서 4번째) 제공) 브리지원 소속 단기 선교팀이 이현우 선교사 부부(오른쪽 끝 두 사람)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진료를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빵과 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이제 당연한 ‘사전 진료’가 됐다.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이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치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치료비는 받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주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가져오는 바나나 한 송이, 고구마 몇 알에 이 선교사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팀원들과 그 감사를 나눈다. 배고픔이 익숙한 이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더 감사하다.

아이티는 아이티 사람이 바꿔야

현재 이현우 선교사의 사역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미래 지도자 양성’과 ‘경제적 자립’이라는 두 축으로 나뉜다.

이 선교사는 까락골(Caracol) 센터를 중심으로 신학대학과 영어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티 현지 목회자의 95%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미국의 교수진을 줌(Zoom)으로 연결해 신학을 가르친다.

또한, 아이들이 국제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유치원부터 영어 교육을 강조한다.

“아이티가 사는 길은 미국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지도자가 나와야 이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현우 선교사의 신념이다.

자립을 향한 그의 집념은 사업가적인 면모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현지인들이 먹지 않는 해삼을 가공해 수출하는 어업 협동조합을 만들고,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9만 평 부지에 당나귀 농장을 세웠다.

당나귀 콜라겐을 추출하고 고기를 활용하는 이 사업은 외부 원조 없이 아이티 교회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일부다.

이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매년 10개의 교회를 새로 개척하고 안정화하는 것이 이 선교사의 목표다.

또한 지역 교회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밤에도 불을 밝히게 함으로써, 교회가 마을의 소통 거점이자 복음의 등대가 되게 하고 있다.

아이티 이현우 선교사.
(Photo : ) 아이티 이현우 선교사.

두 누이를 잃은 작은 리빙스톤이 선교사가 이토록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된 뿌리는 가난하고 아팠던 어린 시절에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였던 부친 밑에서 자란 그는 배고픈 시절을 보냈고, 두 누이를 각각 영양실조와 기생충 감염으로 잃는 비극을 목격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리빙스톤 선교사의 전기를 읽고 “나도 저렇게 병든 이들을 고치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꿈은 평생의 나침반이 됐다.

청년 시절의 시련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17세의 나이로 이미 교회를 개척했다. 1972년 군대에 입대해서는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혹독한 폭행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종 시스템을 개선해 2,500명의 군인 신우회를 조직하고, 불신자 장병들을 위해 소 두 마리를 잡아 대접하는 대규모 전도 행사를 열기도 했다.

“선교지에서는 고난을 받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자원해서 유격 훈련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고난을 대비한 훈련이라고 여겼죠. 그리고 군에서 자동차 정비와 용접 기술을 익혔습니다. 모두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의 것”

2021년 7월, 악명 높은 갱단에게 납치되어 17일간 생사의 기로에 섰던 순간에도 그의 담대함은 빛났다.

갱단 두목이 복면을 벗고 “우리 엄마처럼 예쁘다”며 아내를 통해 마음을 열게 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고백한다.

이현우 선교사
(Photo : MBC 보도 자료화면) 지난 2021년 7월 이현우 선교사 부부와 일행이 아이티 현지 갱단에게 피랍된 후 17일 만에 무사히 석방됐다.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이뤄진 갑작스러운 소식은 주요 외신과 한국 언론들에 의해 알려졌다.

석방 후 한 달 만에 다시 아이티로 돌아온 이 선교사. 이제 한방과 양방 협진이 가능한 종합병원 설립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50년생인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아이티가 한국에 2,500달러를 원조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해에 나를 도왔던 나라에 이제는 내가 빚을 갚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게 아이티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서 죽는 것이 선교사의 영광 아닐까요?”

오늘도 노란 버스에 시동을 걸며 아이티의 오지 마을로 향하는 이현우 선교사. 그의 거친 손등 위로 맺힌 땀방울은 절망의 땅 아이티에 내일이라는 희망의 싹을 틔우는 가장 고귀한 생명수가 되고 있다.

아이티 이현우 선교사
(Photo : ) 이현우 선교사는 아이티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다윗과 같은 지도자 한 명이 배출되면 자신의 사명이 끝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현우 선교사
(Photo : 유튜브 스푼 TV 캡쳐) 이현우 선교사 부부가 아이티 어린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고 함께 기뻐하고 있다.

이현우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프로그램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