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Photo : ) 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주일 오후 교제 모임이었다. 한 청년이 담임목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목사님, 저 다음 주부터 청년부에 나오지 않으려고요.” 이유를 묻자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번 주에 장로님이 전도사님 두고 ‘좌파’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반대편 장면도 있다. 어느 청년부 모임에서 한 청년이 나이 든 성도에 대해 말했다. “저 분들은 어차피 ‘꼴통’이에요. 말해봐야 소용없어요.” 그 자리에 있던 중년 성도 한 분은 조용히 일어나 나갔다. 두 장면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정확하지 않은 언어, 상대를 규정해버리는 말이 공동체를 갉아먹는 것이다. 이 글은 어느 진영도 편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장면 모두를 안타깝게 여기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 ‘말의 책임’을 생각해보자는 초대다.

언어의 혼란은 어디서 오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오용되는 단어가 ‘좌파’와 ‘우파’다. 그런데 이 말의 기원을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용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국민의회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의회 의장석을 기준으로 왕권과 귀족의 특권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오른쪽(우파)에, 혁명적 변화와 평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의원들은 왼쪽(좌파)에 앉았다. 즉 좌파와 우파는 본래 특정 이념의 이름이 아니라 정치적 위치를 나타내는 상대적이고 맥락 의존적인 용어였다.

이 상대성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사회에서 좌파로 불리는 입장이 다른 사회에서는 중도 혹은 우파로 분류될 수 있다. 미국의 민주당이 유럽 기준으로는 중도 우파에 가까운 정책을 가진 경우도 있고, 한국의 보수와 미국의 보수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좌파’라는 단어 하나로 상대방의 신앙적 정체성이나 이념적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개념적으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용어가 교회 안에 들어올 때 발생하는 문제다. 좌파·우파라는 정치적 위치 개념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전혀 다른 사상 체계와 무분별하게 결합되면, 언어는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낙인의 도구로 전락한다.

한국 교회와 한인 교회, 언어가 거칠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추상적 논의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해외 한인 교회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그 언어와 정서가 교회 안으로 그대로 유입되었다. 설교 중에 특정 정치 세력을 겨냥한 발언이 등장하고, 교회 단체 채팅방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치 콘텐츠가 쉼 없이 공유된다. 교제 모임은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정치 토론의 장이 되고, 세대 간·성향 간 언어의 온도 차는 점점 벌어진다. 한국리서치가 2023년에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에 따르면, 종교를 가진 응답자의 41%가 “교회(혹은 종교 공동체) 안에서 정치적 발언으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목회데이터연구소(2023)가 실시한 청년 신앙 이탈 원인 조사에서는 20-30대 탈교인의 27%가 “교회 내 정치적 갈등과 편향된 언어”를 이탈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수치는 현상의 일부일 뿐이지만, 이 데이터는 직관적 경험이 집단적 현실임을 확인해 준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의 한인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거주국의 정치 지형과 한국의 정치 지형이 동시에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한인 교회는 두 나라의 정치적 긴장을 이중으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미국 대선 결과를 놓고 성도 간 갈등이 생겼고, 어떤 교회에서는 한국의 정치 현안이 예배 후 교제 시간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공통적이다. 청년들이 떠나고, 오랫동안 신앙을 지켜온 성도들이 상처를 받으며,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적 동질성의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한국교회탐구센터(2024) 보고서는 2010년 이후 한국 개신교 신자 수가 약 15% 감소했으며, 특히 20대 청년 비율이 같은 기간 절반 수준으로 줄었음을 보여준다. 이민 교회 연구자인 풀러신학대학원 이민목회연구소(2022) 보고서 역시 북미 한인 교회 청년층 이탈 원인 중 “정치적 동질화 압력과 편향된 공동체 언어”를 상위 요인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분위기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위협받는 위기다.

혼동되는 개념들을 구분해야 한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다. 개념이 뒤섞이면 생각이 뒤섞이고, 생각이 뒤섞이면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교회 안에서 가장 자주 혼용되는 세 가지 개념 쌍을 살펴보자.

첫째, ‘좌파’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혼동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좌파·우파는 상대적 위치 개념이고,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특정 이념 체계다. 이 둘은 범주가 다르다. 좌파적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곧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우파적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 혼동을 바로잡는 것은 이념적 관용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개념적 정직의 문제다.

둘째, ‘자유주의’의 혼동이다. 신학적 자유주의와 정치철학적 자유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정통 교리를 약화시키는 신학적 입장으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반면 정치철학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법치주의,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유롭게 예배하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는 바로 이 정치철학적 자유주의의 유산 위에 서 있다. 이 둘을 혼동하면, 우리 자신이 누리는 신앙의 자유를 떠받치는 가치 체계에 스스로 발을 걷어차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셋째, ‘민주주의’와 경제 이념의 혼동이다.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이지 경제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도 다양한 경제 정책이 정당하게 논의되고 선택될 수 있다.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것이 곧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시장경제를 강조한다고 해서 곧 신앙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경제 정책의 복잡한 현실을 신앙의 언어로 단순화하는 것은 복음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일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경계, 어떻게 현명하게 해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념적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명확히 말한다. 20세기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교회는 지하로 내려갔으며, 성경은 금서가 되었다. 구소련, 중국, 북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신앙의 자유는 철저히 짓밟혔다. 이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경계심은 단순한 정치적 편견이 아니라, 피로 쓴 교훈에서 나온 신앙적 지혜다.

문제는 그 경계의 방식이다. 경계가 효력을 가지려면 정확해야 한다. 잘못된 경계는 오히려 진짜 위험을 가리는 역효과를 낳는다. 다음 세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현명한 경계의 출발점이다. 첫째로,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소련, 북한, 중국 등)의 종교 탄압과 인권 억압은 분명한 사실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타당하다. 둘째로,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복지, 공공의료, 노동권 등)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논의되는 정책 선택의 문제이며, 이것을 곧 공산주의 체제와 동일시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 정의 지향은 신앙적 헌신과 독립적일 수 있으며, 진보적 견해를 가진 성도를 자동으로 ‘신앙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오류다.

진짜 위험을 진짜 위험이라고 말하는 힘은, 정확한 언어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빨갱이’나 ‘좌파’로 묶어버리는 언어는 늑대가 진짜 나타났을 때 아무도 듣지 않게 만드는 ‘양치기 소년’의 언어가 된다. 신앙의 공동체를 지키고 싶다면, 경계의 언어도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언어의 혼란과 낙인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 성향의 성도가 진보적 성향의 사역자를 ‘좌파’, ‘빨갱이’로 규정할 때 그것은 대화를 닫는 말이다. 그러나 진보 성향의 청년이 나이 든 성도를 ‘꼴통’, ‘수구’로 규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낙인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야고보는 경고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약 3:6). 불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특정 진영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도전이다.

언어의 혼란이 낳는 세 가지 상처
첫째, 복음의 걸림돌이 된다. 예수님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의 손실이다. 잠언은 말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둘째,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다. 이념적 낙인은 사랑이 흘러야 할 자리에 경계와 적대감을 심는다. 우리는 어떤 정치 진영에 속하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갈 3:28).

이 말씀의 무게를 오늘의 맥락에서 새겨야 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단순한 평등 선언이 아니다. 바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더 이상 우선적 정체성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보수와 진보, 노년과 청년이라는 정치적·세대적 구분 역시 그리스도 안의 연합 앞에서 그 절대성을 잃는다. 우리가 서로를 진영의 이름으로 규정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로 만드신 것을 우리 손으로 갈라놓는 셈이 된다.

셋째, 신앙의 언어가 이념의 언어에 종속된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 “저 사람은 어느 편이야?”가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보다 먼저 나오게 되었다. 진영의 언어가 복음의 언어를 밀어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불렀다(엡 4:15). 그 한 문장 안에 두 개의 긴장이 있다. 진리를 말할 때 사랑을 버리지 않는 것, 사랑을 내세울 때 진리를 흐리지 않는 것. 낙인 언어는 앞의 긴장을 끊고, 무조건적 침묵은 뒤의 긴장을 끊는다. 교회의 언어는 이 긴장을 불편해하지 않고 두 손으로 함께 붙드는 것이어야 한다. 쉽지 않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말하기가 세상의 말하기와 다른 이유다.

보수 신앙의 유산을 지키는 길: 정확한 언어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이 오랫동안 교회를 사랑하고 지켜온 성도들일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반기독교적 이념의 위험을 경계해온 그 헌신과 역사는 가볍지 않다. 그 우려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분들에게는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경계가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역사다. 가족이 신앙 때문에 박해받았고, 예배당 문이 강제로 닫혔으며, 성경을 숨겨야 했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경고는 단순한 정치적 편견이 아니라 피로 쓴 증언이다. 그 증언의 무게를 이 글은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이 요청하는 것은 경계의 포기가 아니라 경계의 정확성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정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 위험을 경고하는 말이 힘을 가지려면, 그 말이 신뢰받아야 하고 정확해야 한다. 개념이 뒤섞인 언어, 낙인으로 기능하는 언어는 오히려 정당한 경고의 힘을 약화시킨다. 정확한 언어는 보수 신앙의 유산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 다음 세대를 교회 안에 붙들고 싶다면, 그들이 복음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 때문에 떠나지 않도록 하고 싶다면, 언어를 다듬는 일이 그 출발점이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다. 더 정확하고 더 강한 방어선을 세우는 일이다.

진보 신앙의 과제: 공동체를 향한 언어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분들은 교회 안의 경직된 언어에 오랫동안 상처받아온 성도들일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기후 위기와 이민자 문제에의 목소리, 젊은 세대의 정의감은 복음의 정신과 충돌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의 편에 서셨고, 교회 역사에서도 사회 정의와 신앙의 결합은 노예제 폐지 운동부터 민권 운동까지 풍성한 유산을 남겼다. 그 헌신과 예언자적 감수성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선한 의도가 언어에서 꼬이는 순간이 있다. ‘꼴통’, ‘수구’, ‘틀딱’과 같은 말은 정의를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대를 규정하는 언어다. 나이 든 성도의 경험과 신앙 여정을 ‘구시대의 유물’로 압축할 때, 대화는 닫힌다. 진보적 감수성이 공동체 안에서 빛을 발하려면, 그것이 비판의 언어를 넘어 포용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세대가 교회 안에서 발언권을 얻고 싶다면, 그 발언이 낙인이 아니라 설득의 언어여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타협이나 침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예언자적 신앙의 오랜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첫째, ‘낙인어’를 ‘서술어’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저 사람은 좌파야”라는 말 대신 “저 분은 복지 정책에 대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신 것 같아”라고 말해보자. “저 어르신들은 꼴통이야” 대신 “세대 간에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겠다”고 말해보자. 이것은 단순한 어휘 교체가 아니다. 상대를 한 단어로 종결시키는 대신, 대화가 계속될 여지를 남기는 일이다. 낙인은 마침표이고 서술은 쉼표다. 공동체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 위에서 살아간다.

둘째, 발언 전에 ‘한 박자 멈추기’를 실천해야 한다. 교제 모임이나 단체 채팅방에서 정치적 콘텐츠를 공유하거나 논평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물어보는 습관을 들이자. 이 말은 사실인가? 이 말은 필요한가? 이 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가? 세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가 나온다면, 그 말은 삼키는 것이 지혜다.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고 했다. 이 권면은 소극적 침묵이 아니라,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의 적극적 절제다. 교회 지도자들은 특히 이 역할을 모범으로 보여줄 책임이 있다. 설교단이나 소그룹 자리에서 검증되지 않은 정치적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의도와 무관하게 공동체 언어의 수준을 낮추는 일이 된다.

셋째, 공동체 안에 ‘말의 규칙’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소박한 약속이면 충분하다. 예를 들어 소그룹이나 교제 모임에서 “우리 모임에서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칭하는 발언은 자제한다”거나 “의견이 다를 때는 상대방의 말을 내 말로 먼저 요약한 뒤 반응한다”는 식의 작은 규칙을 약속해보자. 이런 규칙은 검열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어느 진영도 편들지 않는 공간, 복음이 정치보다 먼저인 공간—그것이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이유다.

말의 거룩함을 회복하며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은 처음에 소개한 두 장면이었다. 교회를 떠나려는 청년, 조용히 일어나 나간 중년 성도. 두 사람은 아마 지금도 어딘가의 교회 안에 있다. 혹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채 교회 밖에 있다. 그들을 머물게 하거나 돌아오게 하는 것은 더 정교한 신학 강좌도, 더 세련된 예배도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한 장로가, 한 청년이, 한 목사가 다음에는 다르게 말하기로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다. 공동체를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도구다.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말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 진영의 과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 모두의 과제다.